[시가 있는 휴일] 가만히

입력 2025-09-12 02:01

연분홍색이 아직 이렇게나 선명한데
꽃이 떨어지고 말았다 꽃받침만 남은 화병,

꽃송이를 만져보았다 꽃잎이 벗겨진다 꽃 속에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끝이 푸른 꽃잎
반대로 생각하기

나는 한 번도 네가 되고 싶었던 적이 없어
네가 부드러웠을 뿐, 머리를 쓰다듬어주다가
너와 손깍지를 낀다

불이 꺼져 있어 몰랐을 테지만
물을 마시고 싶었어 그래서 나는 네 곁을 떠나

내일은 집에 가는 날이다 최대한 멀리 가능한 한 늦게
돌아가고 싶다, 더 갈 수 없을 만큼 다 잊어버릴 때까지
움직이기 싫었다

언젠가 네가 등을 돌리더라도 내가 이렇게
안아주면 너는 뒷모습을 보이지 않는 거니까 그러면
그때도 너를 숨기는 기분이 들까?

무슨 생각 해?
너의 눈에 다가가 묻는다 너는 외면하지도,
물러나지도 않는다 오히려 편안해 보인다

-오은경 시집 '둘이 거리로 나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