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왕국의 비밀

입력 2025-09-12 02:30
마라토너이자 인류학자인 저자는 에티오피아에서 약 15개월간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며 그들이 최고가 될 수밖에 없는 비밀을 기록했다. 사진은 에티오피아 선수들이 아스팔트 위에서 도로 훈련을 하는 모습. 서해문집 제공

세계 마라톤 대회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는 선수는 대부분 케냐와 에티오피아 출신이다. 동아프리카의 두 나라가 세계 마라톤을 양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왜 잘 달릴까. 마라톤 풀코스 2시간 20분 53초 기록을 보유한 마라토너이자 영국의 인류학자인 저자도 같은 의문을 품었다. 그는 2015~16년 15개월 넘는 동안 에티오피아에서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며 그 비밀 속으로 직접 들어간다. 인류학적 현장 연구였다. 왜 케냐가 아닌 에티오피아였을까. 에티오피아는 덜 알려진 미지의 땅이기 때문에 저자에게 더 매력적인 곳이었다. 동아프리카 마라톤과 관련된 서적과 연구는 영어로 소통할 수 있고 호텔 등 편의 시설이 잘 갖춰져 있는 케냐에 집중돼 있다. 다른 한편으론 에티오피아의 예외적 끌림도 한몫했다. 에티오피아는 325년,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세계에서 두 번째 국가이자 아프리카 최초의 기독교 국가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독자적인 문자 체계를 가진 유일한 국가이자 유럽의 식민지 지배를 받지 않은 유일한 국가였다.

에티오피아 선수들은 일주일이면 사흘을 해발 3800m 엔토토산에서 훈련한다. 단순한 심폐 기능 강화 차원을 넘어 그곳에 ‘특별한 공기’가 있고, ‘계산할 수 없는 신비로운 힘’이 그들의 성공에 작용한다고 믿는다. 심박수 모니터와 GPS 시계를 착용하고 계획된 페이스로 달리며 ‘과학적’ 훈련을 하는 다른 나라 선수들과 달리 그들은 직관을 따른다. 저자는 “자기 몸, 다른 사람 그리고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직관을 따를 때 처음 달리기에 매료됐던 이유를 잃지 않고도 여전히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면서 “기술과 과학에 과도하게 의존한 나머지 영혼을 고갈시키는 훈련 방법론에 대안이 존재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한다.

에티오피아 선수들은 예외 없이 함께 훈련한다. 저자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앞사람 발을 따라 뛰라”는 것이었다. 발을 따라 뛴다는 것은 단순히 속도를 맞추는 게 아니라 보폭을 같게 하며 앞사람의 리듬에 자신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맞추는 일이다. 영국과 스코틀랜드, 프랑스의 클럽에서 훈련했던 저자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개념이었다. 훈련을 거듭하면서 저자도 익숙해졌고 그 과정에서 팀워크의 가치를 배웠다. 그는 “다른 선수의 발을 따라 달린다는 것은 그 사람의 리듬에 맞춰 뛰면서 그 사람의 에너지를 자신의 에너지로 활용하는 것”이라면서 “선수들은 서로 에너지를 나누며 함께 발전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여러 가닥의 실이 모이면 사자도 묶을 수 있다’는 에티오피아의 속담을 소개하며 “훈련은 개인적으로 진행되는 적자생존식 경쟁이 아니라 함께 노력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아프리카 마라톤 선수들에 대한 오해는 많다. 서양의 미디어는 신발조차 없는 열악한 환경과 고난 덕분에 그들이 성공했다는 낭만적 이미지로 그려낸다. 저자가 실제로 확인한 에티오피아의 선수들은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를 갖추고 있었다. 훈련 시간, 훈련과 훈련 사이의 휴식 시간, 훈련을 꾸준히 이어가기 위한 충분한 음식, 러닝화 같은 각종 장비, 적절한 훈련 장소로 이동하는 교통비까지 모두 가족의 지원이 필수였다.


국가적인 지원도 간과할 수 없다. 에티오피아 육상은 국가 주도로 발전해왔고 애국심과 국가적 자부심이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육상 선수들을 지원하는 각종 제도는 유럽 어느 국가보다 더 잘 갖춰져 있다. 에티오피아 1부 리그에 속한 육상 클럽은 모든 선수에게 다른 일을 하지 않고도 충분히 생활할 수 있는 급여를 지급한다. 주니어 선수들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소규모 클럽은 훈련뿐 아니라 식사와 숙소 장비까지 지원한다. 그들에게 마라톤 선수의 길은 곧 삶을 바꾸기 위한 선택이었다. 저자는 “선수가 되기 위해 훈련한다는 건 교육, 취업 기회, 심지어 결혼까지 포기해야 하는 엄청난 투자와 희생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유전자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잘못된 생각이다. 그들은 선천적인 운동 능력이나 유전적 재능을 믿지 않는다. 종교적 영향이 크다.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기회’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이딜’이라는 개념을 지니고 있다. 이딜은 하나님만이 아는 내적 존재 상태이며, 성실하고 올바르게 노력하면 신의 뜻에 따라 경이롭고 초월적인 성취를 이룰 수 있을지 모른다고 믿는다. 그래서 코치들은 “넌 변할 수 있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선수들도 다른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보면서 ‘저 사람이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저자는 “신체가 본질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훈련하면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는 확신이 깔려 있다”고 해석한다. 이딜에 대한 믿음 때문에 경기에서 원하는 성적을 얻지 못해도 받아들이되 포기하지 않는다. 저자는 “훈련과 경기의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달리기에 임하면 결국 모든 게 잘 풀릴 것이라는 이 믿음은 성공과 실패 앞에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15개월여의 경험을 토대로 쓴 논문으로 영국 에든버러 대학에서 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경험을 엮어쓴 첫 책으로 2022년 인류학 분야 최고의 상인 ‘마거릿 미드상’을 수상했다. 그가 에티오피아의 마라톤 선수들에게서 배운 것은 고통을 즐기고, 현재에 집중하며, 서로를 경쟁자이자 동료로 인정하고, 달리기를 삶과 하나로 여기는 문화였다.

⊙ 세·줄·평 ★ ★ ★
·에티오피아 선수들, 오해해서 미안해
·에티오피아 숲속을 함께 달리는 것 같은 생생한 묘사가 돋보인다
·적절하게 안배된 인류학적 성찰도 흥미롭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