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이 전·화·기 한번에 뽑던 시절 끝나” 이공계생들 한숨

입력 2025-09-11 00:02 수정 2025-09-11 00:02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진. 뉴시스

지난 9일 서울 동대문구 서울시립대 취업박람회를 찾은 대학원생 최모(27)씨는 기대와 다른 현실에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다. 전기전자컴퓨터공학 전공인 그는 연구개발 직무 채용정보에 큰 기대를 걸었지만 막상 현장에서 만난 대기업 인사담당자는 “이번 분기에는 인력이 필요한 팀만 소수로 채용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최씨는 “대기업이 공채로 ‘전·화·기(전기전자·화학·기계)’ 계열을 한꺼번에 뽑아주던 시절은 끝난 것 같다”며 “요새는 이공계열 학생들도 갑작스러운 수시채용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공고를 들여다보는 게 일상”이라고 말했다.

최근 열린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 취업박람회에서도 취업준비생들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학생들이 기업 부스마다 몰렸지만 구체적인 채용 여부나 선발 인원은 공개되지 않았다. 성균관대 4학년 최모(25)씨는 “이번 분기엔 채용 계획이 없으니 앞으로 관심을 가져 달라는 얘기만 들었다”며 “취준생들 사이에서 대졸 공채는 사실상 사라진 제도가 됐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가을 취업 시즌을 맞아 서울 주요 대학에서 채용박람회가 개최되고 있지만 경기침체 여파가 대학가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과거에는 대기업이 공채 한 번으로 이공계 출신 다수를 한꺼번에 선발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수시채용으로 소수 지원자만 뽑는 흐름이 뚜렷하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지난 3월 100인 이상 기업 500곳을 대상으로 진행한 2025년 신규채용 실태조사에 따르면 응답 기업의 70.8%가 “신규 채용 시 수시채용만 실시한다”고 답했다. 국내 10대 대기업 인사담당자는 10일 “부서별 인력 수요가 달라 각 분기 수시채용 때 유동적으로 뽑고 있다”며 “수시채용을 자주 연다고 해서 인원을 많이 뽑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주요 기업들이 신입 공채 대신 수시채용과 경력직을 선호하다보니 이렇다할 경력이 없는 졸업 예정자들은 지원 기회마저 박탈당하고 있다. 특히 실무 경험이 없으면 인턴 지원도 쉽지 않아 취업시장에서 뒤처지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이런 분위기 탓에 직장인들이 이직 등의 목적으로 주로 찾는 사이트에 이력서를 올리는 대학생들도 늘고 있다. 성균관대 3학년 김모(23)씨는 “요새 대학생들은 취업사이트인 링크드인에 인턴 경험을 홍보하고 구직 지원을 시도한다”며 “사람인, 잡코리아 같은 사이트는 즐겨찾기해 두고 새로고침한다”고 말했다.

해외 취업문을 두드리는 청년들도 있다. 서울시립대 4학년 박모(27)씨는 “외국어 요건이 부담스럽지만 국내 채용문이 좁아 해외 취업을 알아보고 있다”며 “해외 취업 플랫폼을 통해 구직하거나 링크드인을 통해 해외 현직자에게 ‘커피챗’(실무 조언을 얻기 위한 대화)을 요청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대학원 교수는 “채용시기나 인원을 알 수 없는 고용 구조하에서 구직자는 더 큰 불확실성을 겪게 된다”며 “최소한의 정보 제공과 더불어 청년들이 예측할 수 있는 안정적인 채용 구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찬희 기자 becom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