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24시간 불을 밝히며 동네를 지키는 편의점은 주로 물건을 사기 위한 효율과 편리함을 위한 공간이다. 사람 간의 관계가 거의 필요 없는 기능적이고 기계적인 장소인 셈이다. 소비 중심의 이곳에서 서로의 삶을 나누거나 따뜻한 교감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얼마 전 개척교회 사모인 친구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는 편의점은 조금 다른 공간으로 다가왔다. 편의점 한쪽 귀퉁이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책을 펼쳐 들고 친구의 퇴근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계산대에 올려진 물품을 바코드로 ‘삑’ 찍는 소리가 잦아들 무렵 친구는 중년의 여성에게 안부를 물었다. “병원에 입원한 어머님은 회복하셨나요.” 또 다른 청년에게는 “지난번 면접은 어땠어요”라며 관심을 건넸다. 초등학생에게는 “만날 라면만 먹지 말고 삼각김밥도 좀 먹어. 그래야 키 큰다”라며 넉살 좋은 잔소리까지 곁들였다.
그 모습을 보며 절로 웃음이 터졌다. ‘계산만 해주면 될 일을 굳이 마음을 쓰고 애를 쓰나. 역시 사모의 오지랖이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동네 사람들을 향한 친구의 참견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앞치마를 벗고 마주 앉은 친구는 “편의점에서 일하다 보니 동네 사람들의 삶이 보인다”고 했다. 배우자를 잃고 홀로 지내는 노인, 부모의 이혼 뒤 매일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아이까지…. 손님들의 표정과 짧은 대화 속에서 그들의 사정과 마음이 드러난다고 했다.
가장 어려운 순간은 힘든 이들을 마주하고도 어떻게 손을 내밀어야 할지 모를 때라고 했다. 값싼 삼각김밥이나 컵라면으로 하루를 버티는 이들에게 가끔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아 드린다”며 음식을 건네지만, 그것도 몇 번뿐. 자칫 이곳이 그들에게 부담과 미안함이 얽힌 곳이 될까 늘 조심스럽다고 했다.
친구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 불현듯 김호연 작가의 소설 ‘불편한 편의점’이 생각났다. 소설 속 편의점에는 기억이 온전치 않은 노숙인 ‘독고’가 아르바이트생으로 들어온다. 처음엔 그의 존재가 다른 사람들에게 다소 불편한 존재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그의 서툰 행동과 엉뚱한 실수는 뜻밖에도 손님들의 얼굴에 미소를 띠게 하고 마음에 작은 위로를 남겼다.
어쩌면 친구 사모가 편의점 손님들에게 건넨 안부도 누군가에게는 불필요한 간섭처럼 여겨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짧은 인사에 스민 온기가 어떤 이에게는 위로가, 또 다른 지친 이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작은 숨결 같은 힘을 불어넣어 주고 있진 않을까.
울산 남구에서는 지난해부터 24시간 불을 밝히는 동네 편의점을 활용한 ‘편의점 위기 발굴 사업’을 실험 운영하고 있다. 점주가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손님을 발견하면 포스기의 ‘신고’ 버튼을 눌러 구청에 알릴 수 있고 공무원은 현장을 찾아 상담한 뒤 필요 시 편의점 바우처 지급과 생계·주거 지원 등 맞춤형 복지로 연계하는 시스템이다.
이 사업으로 실업급여가 끊겨 술과 라면으로 버티던 실직자, 보이스피싱 피해자, 병환으로 힘들던 이들이 지원을 받게 됐다고 하니 우리 사회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복지의 빈틈을 편의점이 대신 메운 셈이다. 힘들어하는 이웃을 보며 그저 걱정만 하던 점주들 역시 이제는 버튼 하나로 도움을 줄 수 있어 환영하는 분위기다.
일상의 공간인 동네 편의점의 작은 관심이 복지 사각지대 이웃을 살리는 희망의 마중물이 되고 있다는 소식에 친구 사모는 울산의 신고 버튼이 전국의 편의점으로 퍼지길 매일 기도 중이다. 그의 바람은 소설 ‘불편한 편의점’ 속 노숙인 독고의 고백과도 닮아 있다.
“결국 삶은 관계였고 관계는 소통이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내 옆의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데 있음을 이제 깨달았다. 행복은 뭔가 얻으려고 가는 길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길 자체가 행복이었다.”
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