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5년 10월 13일 오스트리아 빈 콘체르트하우스.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LSO)와 피아니스트 예핌 브론프만이 바르톡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협연했다.
공연이 끝난 뒤 제1 바이올린 연주자 리스 왓킨스가 SNS에 올린 사진을 보고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브론프만이 연주한 피아노 건반이 피로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LSO 관계자는 콘서트 당일 아침 브론프만이 손가락을 베였고, 상처가 깊어 연주를 취소해야 했지만 브론프만이 “관객을 실망시킬 수 없다”며 무대에 올랐다고 설명했다. 연주 도중 상처가 벌어져 피가 흘렀지만 브론프만은 끝까지 의연하게 연주를 마쳤다. 이른바 ‘피에 물든 피아노’ 사건은 그의 예술혼을 상징하는 일화로 남았다.
거장 브론프만(67)이 오는 21일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에서 데뷔 50주년 기념 내한 리사이틀을 갖는다. 내한 공연은 2023년 로열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CO)와 함께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한 지 2년 만이다. 독주 무대로 관객을 만나는 것은 2001년 이후 24년 만이다.
그는 내한에 앞서 국민일보와 가진 서면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그 순간에는 멈출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음악이 저를 이끌었고, 관객과 오케스트라가 함께했다”고 말했다.
옛 소련 출신으로 이스라엘을 거쳐 미국으로 이주한 브론프만은 기교와 섬세한 서정성을 겸비한 피아니스트다. 1975년 주빈 메타가 지휘하는 몬트리올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국제무대에 데뷔했다. 독주, 실내악, 협주곡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그는 그래미상과 에이버리 피셔상 등을 받으며 미국을 대표하는 연주자로 자리매김했다.
데뷔 50주년 소감을 묻자 그는 “부상이나 어려운 레퍼토리, 자기 의심의 순간 등 많은 도전을 겪었다. 그러나 음악 그 자체가 언제나 나를 일으켜 세웠다”면서 “피아노와 내가 사랑하는 작품들로 돌아올 때마다 새로운 힘을 얻는다”고 답했다.
이번 내한 리사이틀은 슈만과 브람스, 드뷔시, 프로코피예프의 작품으로 구성된다. 1부에서는 슈만의 ‘아라베스크 C장조, Op.18’과 브람스의 ‘피아노 소나타 3번 f단조, Op.5’를 통해 깊이 있는 서정과 내면의 열정을 들려준다. 2부에서는 드뷔시의 ‘영상 제2권, L.111’과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소나타 7번 B♭장조, Op.83’으로 다채롭고 역동감이 느껴지는 근대 피아노 음악의 정수를 선보일 예정이다.
브론프만은 “서로 다르지만 동시에 깊이 연결된 슈만과 브람스의 음악 이후 드뷔시로 시작해 프로코피예프로 발전해 가는 근대 음악의 흐름을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라며 “섬세한 드뷔시에 이어 전쟁 같은 폭발적 강렬함을 지닌 프로코피예프가 연주될 때는 음향적 충격파처럼 느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브론프만은 “한국 음악가들의 탁월한 기교와 음악적 감수성의 조합에 감탄한다”며 한국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한국 관객에 대한 존중도 빼놓지 않았다. 그는 “(24년 전) 리사이틀의 기억이 생생하다. 한국 청중은 열정적이고 집중력이 있었다. 이후 한국 공연을 올 때마다 청중의 열정이 점점 더 깊어지는 것을 느꼈다”면서 “한국 무대에 오를 때면 오랜 세월 만나지 못했어도 다시 만나면 곧바로 마음이 통하는 오랜 친구를 만나는 듯하다”고 말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