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저지 한인타운에서 나는 다시 음악으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우연히 들어간 악기점에서 피아노를 치던 내 모습을 본 사장님과 함께 작은 음악회를 기획하게 됐다. 공연 무대에서 사람들의 따뜻한 시선을 받으며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감정을 되찾았다. ‘내가 아직 살아 있구나. 다시 시작할 수 있겠구나.’ 그 감격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그곳에서 만난 이들은 나에게 관심과 사랑을 베풀었고 나는 조금씩 회복의 길을 걸어갔다. 시간이 흐르며 뉴욕과 뉴저지 무대에서 연주 기회를 얻었고 일본 재즈 뮤지션들과도 교류하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공연을 마치고 무대를 내려오니 꽃다발을 든 신사 한 분이 다가왔다. “선생님, 솔로 연주가 숨이 멎을 정도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연주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림 같았습니다.” 자신을 목사라 소개한 그는 나를 교회에 초청하고 싶다고 했다. 당시 믿음이 약했던 나는 속으로 ‘연주회장까지 와서 꼭 교회 얘기를 해야 하나. 결국 자기 교회로 데려가려는 거겠지’라고 냉소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은 마음에 남았다.
놀랍게도 3개월 후 나는 정말로 그 교회로 발걸음 하게 됐다. 교회 예배 자리에 앉아 있는데 찬양이 흐르자 내 안 깊은 곳에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터져 나왔다. 약으로도 느껴보지 못한 강력한 영적 체험이었다. 두 손을 들어 찬양할 때 전기가 흐르듯 뜨거움이 온몸을 감쌌다. 그날 예배당에 있던 성도들이 나를 중심으로 둘러앉아 눈물로 기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됐다. 나는 그 뜨거운 사랑의 기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듯한 경험을 했다.
그 교회는 음악적으로도 자원이 풍성했다. 줄리어드, 맨해튼, 버클리 등 세계적인 음대 출신이 즐비했다. 그런데 그중 내가 찬양팀 디렉터로 세워졌다. 성경공부도 제자훈련도 받아본 적 없는 내가 30명이 넘는 찬양팀을 이끌고 예배 음악을 총괄하는 일을 맡게 된 것이다. 너무 두렵고 어색했다. ‘내가 감히 이 자리에 서도 되나’ 하는 부담이 매 순간 나를 짓눌렀다. 하지만 그 두려움보다 ‘다시 살아보고 싶다’는 열망이 더 컸다. 나는 교회를 통해 예배를 회복하려 애썼고 조금씩 믿음의 씨앗이 자라났다.
어느 날 연습 후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목사님이 내게 불쑥 식사 기도를 부탁하셨다. 그때까지 나는 단 한 번도 사람들 앞에서 기도해본 적이 없었다. 순간 온몸에 진땀이 흘렀다. 겨우 “주님, 감사합니다”라는 짧은 고백을 내뱉자 다른 이들이 “아멘”으로 화답했다. 나머지 말이 떠오르지 않아 멈칫거렸다. “지노 선생님, (대표)기도 처음 해보시나 봐요.” 목사님이 미소지으며 건넨 말에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부끄러웠지만 그날의 경험은 또 다른 시작이었다.
여전히 서툴렀지만 신앙공동체에서 함께 음악 하는 걸 배우던 때였다. 무엇보다 교회는 나를 단순한 연주자가 아닌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려 애썼다. 내게 교회는 새로운 음악 무대이자 다시 태어나도록 이끄는 훈련장이었다. 나는 음악인으로서 다시 호흡했고 동시에 믿음의 사람으로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정리=김수연 기자 pro111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