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이 사라졌다. 얼굴이 두꺼워도 너무 두껍다. 잘못이 드러나도 사과하지 않고 책임지지 않으며 뻔뻔한 태도로 일관한다. 하루아침에 말을 뒤집고, ‘배 째’라고 드러눕는다. ‘기억나지 않는다’로 회피한다. 불리하면 오해라고 하거나 남 탓만 한다. 책임질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서, 의도가 불순해서, 정치 공세라서 등 변명으로 일관한다.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손해를 입을 수 있으니 아예 끝까지 버텨야 한다고 판단하는 듯싶다. 사과는 약점이고, 버티기는 용기인가. 듣고 보고 있는 사람이 되레 부끄러울 지경이다. 도저히 버티기 힘들어 마지못해 사과하는 상황도 다반사다. 사과문은 진정성 없는 형식적 문구투성이다. 윗사람이 그러니 하급 공무원까지 ‘모르쇠’로 일관하고, ‘ㅂㅅ’을 쓴 문서를 공적인 자리에 들고 가 무표정으로 눈만 껌벅거린다. 들키지나 말지, 한심하다 못해 참담하다. 몰염치, 파렴치가 모두에게 옮아가고 있다. 병리 현상이다. 자칫 사회 전체의 신뢰를 무너뜨리게 생겼다.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재상 관중은 ‘예(禮) 의(義) 염(廉) 치(恥)’를 국가의 4가지 기강이라고 했다. “예는 행동이 절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요, 의는 사상이 도덕적 표준에 부합하는 것이고, 염은 자기의 결점이나 잘못을 감추지 않는 것이요, 치는 스스로 창피함을 알아 부정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국가 기강까지 가지 않더라도 사람이라면 당연히, 반드시 있어야 하는 기본자세다. 혹 없다면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 특히 부끄러움은 최소한의 자제력, 스스로 되돌아보게 하는 마지막 방어선이다. 한자로 부끄러울 치는 귀 이와 마음 심을 합쳐 쓴다. 떳떳하지 못하면 마음이 시끄러워서일 게다. 동물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공자와 제자 증삼의 문답 중 효에 관한 내용을 추린 효경에는 제후 편이 있다.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화합시키는 일이 정치적 효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윗자리에 있으면서 교만하지 않으면 지위가 높아도 위태롭지 않고, 모든 일에 삼가고 절도를 잘 지켜 욕심을 내지 아니하면 권세와 부귀가 차고 넘쳐서 기울지 아니한다”가 핵심 내용이다. 우리 사회지도층과 공직자 대부분은 이와 반대 자리에 앉아 있다. 예의염치 상실은 사회를 서서히 붕괴시킨다. 정치, 경제, 행정 등의 신뢰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공직자일수록 일반인보다 더 높은 도덕적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럴 각오가 없다면 공직을 맡지 말아야 한다. 도덕적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말과 행동을 했다면 부끄러워해야 한다. 부끄러움은 양심의 최후 보루다. 양심은 법과 제도로 통제할 수 없다. 스스로 갈고 닦아야 한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공직자와 사회지도층은 아무리 출중한 능력과 화려한 언변을 지녔다 해도 사회의 짐일 뿐이다. 하급 공무원도 마찬가지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당시 윤동주는 학생이었다. 일제강점기 여러 사람의 언행을 보며 스물다섯 청년은 부끄럼 없는 삶을 지표로 삼았다.
부끄러움을 잃은 자리에 남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허물뿐임을 역사는 이미 숱하게 증명해 왔다.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것은 곧 성찰의 능력을 잃었다는 뜻이다. 성찰 없는 권력은 독선으로 흐르고, 독선은 타락을 낳는다. 염치만 있어도 사회는 달라진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 부끄러움을 드러낼 수 있는 태도다. 죄를 지었으면 당당하게 심판받으면 된다. 국민은 부끄러움을 알고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며 책임지는 모습을 더 높이 평가한다.
전재우 사회2부 선임기자 jw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