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달라졌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텁텁했던 또는 축축했던 바람은 새 옷을 입은 듯 가볍고 산뜻하다. 맞바람 치도록 창문을 여니 몇 초 만에 신선한 기운이 감돈다. 에어컨으로는 실현 불가능한, 대자연의 축복이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섰다. 산책로에 점점이 핀 나팔꽃이 선명하다. 주변의 나뭇잎은 아직 푸르지만 곧 다채로운 빛깔로 물들 것이다. 화살나무 잎사귀는 철쭉보다 더 깊은 진분홍빛으로 변신하고, 단풍나무는 피처럼 붉어지고, 플라타너스 잎사귀는 바싹 말라 한 장씩 천천히 떨어지겠지. 흡사 저주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지독했던 여름이 끝나고 있다. 단군 할아버지가 부동산 투자를 잘못해서 사계절이 바뀌는 한반도에 살게 되었다고, 뚜렷한 계절의 변화로 인해 옷과 이불을 바꾸느라 쉴 틈 없다고 불평한 적이 있다. 1년 내내 따사로운 나라도 있으니까. 하지만 요즘처럼 계절이 바뀌는 문턱에 서면 의외의 감사가 우러나온다. 어딘가에서 서늘한 바람 한 줄기만 불어와도 충분히 감동스럽다. 김현승 시인이 왜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라고 말했는지 절로 수긍이 된다. 이제 기도의 계절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 조용히 두 손을 모은다.
정혜덕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