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태원의 메디컬 인사이드] 비만병, 재난이 안 되려면

입력 2025-09-11 00:38

‘요람에서 무덤까지.’

사회보장제도나 복지 관련 보고서에서 볼 법한 이 관용구가 얼마 전 비만을 주제로 서울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 슬로건에 등장했다. 생애 전 주기에 걸친 비만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일 터다. 그만큼 비만은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공중보건 이슈로 부상했고 문제 해결을 위한 국가·사회적 대응에 공감대가 형성돼 있음을 시사한다.

대한비만학회 자료를 보면 2023년 기준 국내 성인 3명 중 1명 이상(38.4%)이 비만이다. 남성은 절반가량(49.6%)이 비만에 해당됐다. 20·30대 젊은 연령대에서 고도, 초고도비만이 빠르게 느는 추세다. 소아청소년 비만 역시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증가세가 두드러지고 있다. 비만율은 교육이나 소득 수준, 지역에 따라서도 차이를 보인다.

비만을 단순히 개인 혹은 미용 문제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비만이 불러오는 수많은 2차 질환 및 합병증 때문이다. 고혈압, 당뇨병, 심뇌혈관질환, 암 같은 주요 질환 발생은 물론 근골격계, 호흡기, 위장관, 피부 등에도 영향을 미친다. 비만으로 인한 직간접 손실 비용은 엄청나다. 선행 연구를 보면 비만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추정 비용은 2021년 기준 15조6000억원으로 흡연(11조4000억원)과 음주(14조6000억원)를 제쳤다. 비만이 증가할수록 우리 사회가 감당할 대가도 그만큼 불어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한 전문가는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머지않아 비만이 재난으로 다가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우리나라의 비만 정책은 오랫동안 건강증진이나 예방 위주로 설계돼 왔다. 정부는 국가 비만관리종합대책을 내놓고 다양한 사업을 이어왔지만 성과는 제한적이었다. 저소득층을 비롯한 상당수 환자가 여전히 방치되고 있으며 사회 전반에 비만을 개인 책임으로만 돌리는 시각이 남아 있다. 비만 정책 추진 인력과 예산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비만이 안 생기는 환경’ 조성 노력은 특히 미흡하다.

한 학술대회 발표자는 “비만은 사회적 문제이며 국가 차원의 해결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합의가 돼 있다. 다만 비만이 개인의 관리가 필요한 위험요인 중 하나인지, 치료가 필요한 질병인지에 대한 논란은 여전하다”고 꼬집었다. 지금까지 비만 정책의 한계를 제대로 짚은 지적이라 생각된다.

지속 가능한 비만 관리 체계 구축을 위해선 이제 이런 분절적 사고가 아닌 예방과 치료를 하나의 의료 영역에서 포괄하는 통합적 대응 시스템으로 가는 게 맞는다고 본다. 그런데 국내에서 비만 치료에 대한 지원은 2019년 비만 대사수술에 건강보험이 적용된 것이 전부다. 최근 위고비와 마운자로 같은 혁신적인 비만 치료제들이 속속 도입되고 있으나 비급여 처방이어서 환자 접근성이 낮다. 오히려 미용 목적의 오남용과 오처방이 늘고 있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이 때문에 정작 비만 치료가 필요한 저소득층이 소외되는 건강 불평등을 초래할 우려도 제기된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비만 치료제의 건강보험 편입 주장에 힘이 실린다. 급여화되면 취약계층의 비만 해결은 물론 오남용에 대한 모니터링이 가능해진다. 장기적으로는 비만과 연결된 수많은 만성질환을 줄이고 그만큼 의료비 부담을 낮출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영국 일본 등 해외에서도 비만 치료 지원이 활성화돼 있다.

다만 한정된 건보 재정을 감안해 초고도비만자나 저소득층, 소아청소년 등 고위험군을 우선하는 단계적 급여화를 고려할 수 있겠다. 또 가당 식음료에 ‘비만세’를 거둬 비만 치료 및 예방 재원으로 활용하는 것도 검토할 만하다. 아울러 안정적이고 종합적인 비만 관리 정책 추진을 위해선 ‘비만 기본법’ 제정이 필요하다. 현재 국회에는 다수의 비만 질환 예방·관리 법안이 발의돼 있다. 늦지 않게 논의가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