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여성, 그대의 사명은

입력 2025-09-11 00:30

필자는 한 연합단체에서 간사로 시작했다. 재정·홍보·문서·행정·기획 등 다양한 분야를 거쳐 대표에 이르기까지 30년 넘는 시간 동안 여성 사역자로 일해 왔다. 그 여정 속에서 겪은 경험은, 유쾌한 순간도 있었지만 종종 뼈아픈 현실을 마주하게 했다. “여성이기 때문에 대표로는 부적절하다” “목사도 아니고 박사도 아니라서 권위가 없다” “원칙을 지키지 않아도 좋으니 내 말을 따르라”는 주장을 비롯해 차마 글로 옮기기 어려운 일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역에 한계를 두지 않았다. 성별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며 모든 사람은 강점과 약점을 지닌 존재로서 이를 인식하고 조율하는 것이 사역자의 기본 태도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단점이 아니라 선물이 될 수 있었다. 남성 중심의 구조 속에서 여성의 시각은 의사결정과 정책수립 과정에서 중요한 균형점이 되었고, 갈등 상황에서는 완충 역할도 가능했다. 때로는 상대방에게 공격적으로 비치지 않는 특성 덕분에 반대 입장을 피력하면서도 건설적인 논의를 이끌 수 있기도 했다. 이는 단지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마다 다르게 주신 은사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성별의 고유함이 그 은사를 드러내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연합단체 대표로 선임된 날, 한 연로한 여성 선교사가 필자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우리의 한을 풀어주어서 고마워.” 그 말에 담긴 의미를 모르지 않았으나 필자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저는 여성 사역자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제게 맡기신 사명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 서 있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명의 범위를 제한받고 싶지 않았고, 그것이 필자가 붙든 부르심의 본질이었다.

오랜 시간 연합운동 현장을 경험하며 깨달은 것은 한국교회와 선교계가 문화적으로 여성 리더십에 매우 인색하다는 사실이다. 특히 선교계에서는 여성 리더십 개발에 대한 인식조차 희박한 경우가 많다. 2025년 세계경제포럼(WEF)의 성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조사 대상 148개국 중 101위를 기록했다. 전년도보다 7계단 하락한 수치다. 교육·건강 분야는 개선되었지만 정치·경제 전반의 성평등은 후퇴했다. 여기에 종교 영역이 포함되었다면 그 순위는 더욱 낮아졌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선교는 단순한 확장이 아니라 변혁(Transformation)의 사역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 리더십은 단지 숫자를 늘리는 문제가 아니라 교회와 선교의 고착화된 구조를 돌아보는 계기가 돼야 한다. 폐쇄적인 네트워크, 제한된 리더십 구조, 무언의 경계심리 속에서 여성 리더는 여전히 주변부에 머무르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의도적 개발’과 ‘전략적 배치’가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이 주신 절반의 자원을 묶어둔 채 사역하고 있는 셈이다. 기계적인 평등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와 선교계가 지금까지 최적화하지 못한 자원들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신학적·사역적 직무유기를 돌아보자는 것이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이 말씀은 복음 안에서 모든 이가 하나님 나라의 동등한 사역자요 동역자임을 선언한다. 성령의 은사도 사명의 무게도 성별에 따라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교회가 건강하게 반응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과소평가되고 유기돼 있던 여성 자원을 돌아봐야 한다. 여성은 교회의 역동성을 되살리고 선교의 온전함을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자원이다. 여성은 사역의 보완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의 변화를 위해 교회에 주신 선물이다. 그 선물은 여전히 포장된 채 풀리지 않은 보따리처럼 우리 곁에 놓여 있다. 이제, 그 보따리를 열어야 할 시간이다.

이대행(엠브릿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