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정부의 적폐청산은 박근혜정부 청와대 캐비닛 문건이 시작이었다. 이어 사드 발사대 4기 반입 과정의 보고 누락을 이유로 국방부에 대한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정보 유출을 근거로 외교부도 강도 높게 감찰했다. 국방부와 외교부는 태생적으로 보수 진영과 가까울 수밖에 없는 부처다.
개혁 대상이었던 검찰에선 돈봉투 사건 감찰이 시작됐고, 문화계 블랙리스트도 사정 대상에 올랐다. 일련의 적폐청산 작업은 2018년 3월 이명박 전 대통령을 구속할 때까지 1년 가까이 이어졌다. 사실 그게 끝도 아니었다. 그 이후에도 청산 로드맵이 더 남아 있었다. 하지만 2018년 남북 관계가 급진전되면서 시들해진 감이 있다. 적폐청산 작업은 일부는 그럴 만한 개연성이 있었고, 일부는 과했다. 대부분 유무죄가 가려진 이상 평가는 역사가 하겠지만 1년 가까이 이어진 청산에 불편함을 호소했던 국민도 적지 않았다. 당시 청와대에선 “우리도 그만하고 싶다. 하지만 적폐청산을 원하는 국민도 많다”고 말하곤 했다. 헌정사상 첫 대통령 탄핵 이후 들어선 정부인 만큼 선명성을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두 번째 대통령 탄핵 이후 적폐청산 구호는 이젠 징벌로 바뀌었다. 압도적 의석을 바탕으로 더불어민주당은 징벌적 입법에 나서고 있다. 검찰 개혁 작업이 대표적이다. 수사·기소를 분리하기로 한 마당에 중수청을 법무부 산하에 두느냐, 행정안전부 산하에 두느냐 논쟁은 결국 징벌성을 부과하기 위해서다. 민주당 관계자는 “검찰 개혁은 징벌적 개혁”이라며 “법무부에 중수청을 놔둘 경우 징벌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민주당이 말하는 검찰·사법·언론 3대 개혁은 모두 이 같은 징벌적 개혁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현재 민주당의 강성 지지층 ‘개딸’은 개인 팬덤이 아닌 집권을 위한 결사체 성격을 띤다. 권력 쟁취를 위해 필요한 말(馬)을 키워내려 하고, 이들의 눈에 들어 경주마로 나서고 싶은 의원들이 앞다퉈 뛰어든다. 곽상언 의원에 따르면 김어준 방송에 안 나간 민주당 의원이 65명이라니, 이들을 제외한 100여명은 내심 레이스 욕심이 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청산에서 징벌로, 내용은 같으나 말의 수위가 크게 인플레이션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일단 체급을 키워야 하니 합리·중도 진영을 당장 신경쓰지 않는다. 과거엔 재선·최고위원 정도 되면 중앙 정치 무대에서 중도를 돌아보기 시작했으나 지금은 당대표도 만족스럽지 못한 시대가 됐다.
문재인정부의 적폐청산은 박근혜정부에 대한 국민적 충격을 근간으로 삼았다. 반면 지금 민주당의 징벌적 개혁은 대통령실보다 당의 기세가 강해 보인다. 집권 초 강력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실이 말릴 정도로 강도가 세고, 속도도 빠르며, 광범위하다.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을 계기로 시작됐지만 매머드 3대 특검이 동시다발적 수사를 벌이는 점이 적폐청산과는 다르다. 말 많았던 영부인과 내란 사태, 대통령의 ‘격노’까지 수사하는데 정치적 단죄까지 추진할 필요가 있는지 걱정스럽다. 검찰·사법·언론 개혁에서 징벌이 필요한 부분은 특검에 맡기고, 정말 필요한 제도적 개혁을 차근차근 추진했으면 한다. ‘개혁은 타이밍’도 맞는 말이지만 더 중요한 건 올바른 방향과 설계다.
미국 대법관 올리버 웬델 홈스 주니어는 1904년 “큰 사건이 악법을 만든다”고 했다. 1842년 영국 판례 중에도 “어려운 사건은 악법을 가져오기 쉽다”는 경구가 있다. 감정적으로 쏠리는 이슈일수록 평범한 다수의 판단에 맞지 않는 극단적 법이 나온다는 뜻이다. 정치가 위기이지만 경제적으로 내우외환도 큰 시기다. 183년 전부터 나온 현인들의 통찰을 민주당이 꼭 귀담아 들어줬으면 한다.
강준구 정치부장 eye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