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 녹으며 열리는 북극항로… 더 힘받는 K-쇄빙선

입력 2025-09-11 02:15
게티이미지뱅크

‘꿈의 뱃길’로 불리는 북극항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북극항로는 오래 전부터 운항 거리 단축과 물류비 절감 효과를 가져올 ‘해상 게임체인저’로 거론돼왔다. 그러나 혹한의 날씨, 두꺼운 얼음과 빙하가 버티고 있어 개척이 쉽지 않았다.

미지의 영역이던 북극항로는 지구 온난화로 북극의 빙하가 녹으면서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 등 주요국들은 서둘러 항로 개척에 뛰어들었다. 한국도 북극항로 시대 대응에 나설 태세를 갖췄다.

이런 흐름 속에 ‘쇄빙선’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쇄빙선은 얼음을 깨고 항로를 열기 위해 제작된 특수선박으로 고도의 기술력이 요구된다. 쇄빙선 수주 경험이 있는 국내 조선업계가 글로벌 쇄빙선 시장에서 존재감을 드러낼 것이라는 관측도 이어지고 있다.

현 정부 국정과제 ‘북극항로 시대 주도’

현 정부의 주요 국정과제 중 하나도 ‘북극항로 시대를 주도하는 해양 강국 건설’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북극항로 개척을 천명했고, 이는 대통령 직속 국정기획위원회가 발표한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 123대 국정과제에도 포함됐다.

해양수산부는 내년에 북극항로 관련 사업에 5499억원의 예산을 투입할 계획이다. 전재수 해양수산부 장관은 취임사에서 “15세기 콜럼버스가 신세계를 열고 문명을 바꿨듯 북극항로는 대한민국의 내일을 바꾸는 새로운 항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북극항로는 북극해를 따라 유럽과 북미, 아시아를 연결하는 새로운 해상 운송 경로다. 최대 장점은 운항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점이다. 기존에 수에즈 운하를 경유하는 경로보다 훨씬 짧은 거리만 이동하면 되기 때문에 운항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다. 부산항에서 네덜란드 로테르담항까지 갈 경우 수에즈 운하를 거치면 2만㎞를 이동해야 하지만, 북극항로를 통하면 1만3000㎞ 수준으로 단축된다. 운송일 기준 10일 이상 줄어드는 것이다. 해운사 입장에선 연료 소비를 줄이고, 선박을 운용할 수 있는 일수가 늘어 경제적 이득도 높일 수 있다.

이에 더해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불확실성을 덜어내는 ‘대체 항로’로도 가치가 있다. 앞서 2023년 10월 예멘의 후티 반군이 홍해 남부를 지나는 민간 상선을 공격하면서 홍해 사태가 발발했을 때 각국 상선이 홍해~이집트 수에즈 항로 대신 남아프리카공화국 희망봉 항로로 우회하면서 해상운송과 글로벌 공급망이 악화한 바 있다.

다양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미국 지질조사센터(USGS)에 따르면 북극권에는 원유 900억 배럴, 천연가스 47조3000억㎥가량이 매장돼 있다. 지구상에 묻혀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원유와 천연가스 매장량의 13%, 30%에 해당하는 규모다. 또 니켈 코발트 희토류 등 첨단산업에 필수적인 전략 광물도 다량 매장돼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과 러시아 등이 앞다퉈 ‘북극 패권’을 노리는 이유다. 러시아는 2013년부터 국정과제로 삼고 북극항로 개척을 추진 중이다. 중국과 군사·경제적 협력 관계도 구축했다. 중국은 북극권 국가가 아니지만 ‘빙상 실크로드 전략’을 통해 러시아와 함께 경제적 시범항해 데이터를 모으고 있다. 미국은 덴마크령 그린란드의 구매 의사까지 밝히는 등 북극항로 이권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북극 개척의 선봉, 쇄빙선이 뜬다


북극을 둘러싼 주도권 경쟁에 불이 붙으면서 북극 개척의 선봉이라 할 수 있는 쇄빙선 시장도 들썩이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와이즈가이리포트에 따르면 쇄빙선 시장 규모는 지난해 286억 달러(약 39조7200억원)에서 2032년 398억 달러(약 55조2700억원)로 확대될 것으로 추정된다. 연간 4.24% 수준의 성장률이다.

쇄빙선의 주요 시장은 크게 자원 탐사, 관광, 해양 무역 등으로 나뉜다. 자원 탐사는 석유 가스 광물 등 풍부한 천연자원을 보유한 북극 지역을 조사하기 위한 쇄빙선이다. 혹독한 북극 환경에서 오래 버티고, 어떤 상황이든 헤쳐나갈 수 있는 ‘튼튼한’ 선박이 필수적이다. 북극의 독특한 풍경, 야생 동물 문화 체험 등에 매력을 느끼는 관광객을 위한 관광 쇄빙선의 수요도 높아지는 추세다. 해양 무역은 기존 경로보다 더 짧고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북극을 통과하는 새로운 운송 경로를 열어주는 쇄빙선을 의미한다.

조선업계에서도 다양한 분야에서 수요가 있는 만큼 쇄빙선 시장 전망이 밝다고 본다. 업계 관계자는 “기후 변화로 북극 해빙이 빠른 속도로 녹으면서 쇄빙선 발주가 늘고 있는 추세”라며 “경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제품 개발도 치열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한화오션이 세계 최초로 건조한 쇄빙과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을 동시에 하는 '쇄빙 LNG선'이 얼음이 떠 있는 바다를 헤쳐나가고 있다. 한화오션 제공

한국 조선업체들도 국제 쇄빙선 시장에서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HD현대 한화오션 삼성중공업 등 국내 조선 ‘빅3’도 쇄빙선 건조 경험을 갖고 있다. 한화오션은 2008년부터 쇄빙선 건조 기술력을 쌓아왔다. 2014년 15척, 2020년 6척 등 총 21척의 쇄빙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을 건조했다. 지난 7월에는 극지연구소가 발주한 차세대 쇄빙연구선도 수주했다. 차세대 쇄빙연구선은 총 톤수 1만6560t으로 기존의 아라온호(7507t)보다 배 이상 크고, LNG 이중연료 전기추진 체계도 탑재된다. 1.5m 두께의 얼음을 깨고 나아갈 수 있는 양방향 쇄빙 능력을 갖췄다.

한화오션이 2029년 12월까지 건조를 마치고 한국해양과학기술원 부설 극지연구소에 인도할 차세대 쇄빙연구선 조감도. 한화오션 제공

삼성중공업은 2005년 양방향 쇄빙 유조선을 수주한 바 있으며, 2008년에는 세계 최초의 극지용 드릴십을 수주·인도하는 등 검증된 쇄빙·방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HD현대는 계열사인 HD현대중공업과 HD현대미포의 합병 시너지를 통해 쇄빙선 등 특수 목적선 시장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한다는 방침이다.

허경구 기자 ni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