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혹한 재난 현장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등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소방관을 위해 한국교회의 초교파적 지원 연합체 설립이 추진되고 있다. 사단법인 형태의 가칭 소방선교연합회를 설립해 군경과 달리 소방에만 없는 ‘사목 제도’ 도입을 공론화하고 이들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겠다는 구상이다.
9일 교계에 따르면 소방선교연합회 설립 추진은 지난 5일 한석훈 한국기독소방선교회 회장이 이영훈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를 예방한 자리에서 구체화됐다. 이 자리에서 교계 차원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됐으며, 향후 교계 총의를 모아 사단법인 설립을 본격 추진하기로 했다. 설립 실무를 맡은 이승한 순복음구래교회 목사는 “사단법인이 소방관을 지원하는 교계 연합체가 될 수 있도록 추진 중”이라며 “이를 통해 소방관에게 실질적인 영적 지원과 위로를 전하겠다”고 밝혔다(국민일보 2025년 8월 22일자 33면 참조).
현재 소방청 차원의 심리지원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지만 현장에선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익명을 요청한 한 현직 소방관은 “외부 업체와 계약해 ‘찾아가는 심리상담’을 운영하지만 상담사가 소방 조직의 특수성을 깊이 이해하기 어렵고 계약에 따라 자주 바뀌어 지속적인 관계를 맺기 힘들다”며 “결국 마음 터놓을 곳 없는 동료들이 신앙 안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버티는 경우가 많다”고 토로했다.
지난해 소방공무원 마음건강 설문조사에 따르면 PTSD를 겪는 소방공무원은 2020년 2666명에서 지난해 4375명으로 크게 늘었고 같은 기간 우울증을 겪는 소방관은 2028명에서 3937명, 자살위험 소방관도 2301명에서 3141명으로 늘었다.
여기에 군과 경찰 조직과 달리 소방에는 공식 사목 제도가 없다는 점이 문제로 꼽힌다. 2000년대 후반 소방방재청 시절 관련 훈령이 마련됐으나 조직 개편 과정에서 사라졌다. 한 회장은 “군인을 위한 군목, 경찰을 위한 경목과 달리 소방관을 위한 목회자가 없다 보니 조직 내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당당하지 못하고, 대부분 외부에 의지하는 실정”이라며 “이 공백을 현장의 소방관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한국기독소방선교회가 메워 왔다”고 설명했다.
34년간 소방관으로 복무하다 은퇴 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에서 안수받은 한정길 목사(창원경상국립대학교병원 원목)는 현장에서 신앙의 절실함을 증언했다. 그는 2015년 거창소방서장 재직 당시 영하 20도의 눈 폭풍 속에 조난된 등산객 27명을 구조했던 경험을 떠올렸다. 한 목사는 “눈에 덮여 등산로가 사라진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대원들과 조난자들이 엇갈리지 않고 만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며 “새벽녘 무전기 너머로 조난자를 찾았다는 음성이 들렸을 때의 감사는 잊을 수 없다. 현장에서 신앙은 마지막 보루와도 같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소방관은 참혹한 현장을 늘 마주하며 번아웃에 시달린다”며 “단순한 상담이나 행정적 지원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기에, 이들의 소진된 마음을 채우기 위한 영적·정서적 돌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소방관은 특히 시민들의 비극적인 죽음이나 동료의 순직을 눈앞에서 목격하고도 곧바로 다음 현장에 투입돼야 하는 직업적 특성상 충분한 애도의 시간을 갖기 어렵다. 자살예방단체 라이프호프 안해용 사무총장은 “애도 과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그 충격이 개인에게 깊은 상처를 남길 수 있다”며 “억눌린 슬픔과 삶의 근본적인 질문을 다룰 수 있는 영적 지원 체계가 반드시 동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영적 돌봄’은 심리 상담과는 다른 차원에서 필수적인 요소”라며 “세계보건기구(WHO)는 건강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신체·정신·관계적 요소와 더불어 ‘영적 요소’를 중요하게 본다. 신앙 안에서의 위로와 신념은 심리적 안정에 중요한 기제가 된다”고 덧붙였다.
정부 차원의 사목 제도 도입은 모든 종교계가 함께 사회에 기여하는 길이 될 수 있다. 이승한 목사는 “정부가 제도를 만들면 군대의 군승(불교) 군종신부(천주교)처럼 다른 종교도 자신들의 신자를 돌볼 길이 자연스럽게 열린다”며 “이는 모든 종교가 각자 방식으로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소방관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긍정적인 통로를 마련하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김용현 기자 fa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