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움, 아모레퍼시픽 등 대형 사립미술관들이 블록버스터급 생존 작가 개인전으로 티켓몰이를 하는 가운데 사회적 질문을 던지는 차분한 기획전이 공공미술관에서 열리고 있어 눈길을 끈다. 서울 노원구 북서울시립미술관에서 하는 '2025 타이틀 매치- 장영혜중공업 vs 홍진훤 :중간지대는 없다'와 서울 성북구 아르코미술관이 기획한 중견작가 5인전 '안티-셀프: 나에 반하여'가 그것이다.
'2025 타이틀 매치…중간지대는 없다'
루소 '사회계약론'서 주제 따와
민주주의·내란… 사회적 현실 각성
루소 '사회계약론'서 주제 따와
민주주의·내란… 사회적 현실 각성
북서울시립미술관 타이틀매치는 두 작가를 선정해 하나의 주제 하에 조명하는 연례 기획전이다. 올해로 12번째 주인공이 된 두 팀에게 떨어진 전시 주제 ‘중간지대는 없다’는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발췌한 문장에서 땄다. 사회 구성원이 공동이익을 위해 직접 주권을 행사할 것을 촉구한다. 그만큼 요즘 전시에서 보기 힘든 사회적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장영혜중공업은 아트선재센터 개인전 이후 8년 만에 갖는 이번 전시에서 ‘실험은 민주주의다. 파시즘은 제어다’를 주제로 날 선 목소리를 낸다. 장영혜중공업은 장영혜와 마크 보쥬가 1998년 결성한 그룹인데, 리드미컬한 음악에 화면 가득 텍스트를 채운 영상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트선재센터 전시 때는 흰 바탕에 구호처럼 점멸하는 검은 텍스트를 통해 출산에서 취업, 장례까지 ‘삼성공화국’에 사는 한국의 현실을 풍자했다.
이번 전시에 나온 ‘안녕하세요, 여러분, 우리는 특별해요!’(2025) 등 7점의 신작에서는 음악과 텍스트 위주였던 기존 기법에서 나아가 이미지와 목소리가 추가됐다. 내러티브와 문학성이 강화된 것이다. 예컨대 ‘침묵의 쿠데타’에서는 북한이 좀비 엘리트를 육성해 남파, 남한 사회를 교란한다는 가짜 뉴스를 유튜버를 연상시키는 가상 캐릭터가 전한다. 십자가 모양에 온갖 감탄사 문장이 번쩍번쩍 나타나는 작품 ‘우아!’는 텍스트 위주긴 하지만 과거와 달리 나이트클럽 간판처럼 촌스럽고 화려하다. 그 화려함에 비판적 뉘앙스가 숨어 있다.
홍진훤은 ‘사진은 세계를 내란만큼 각성할 수 있는가’를 주제로 4점의 신작을 포함해 6점을 전시했다. 홍 작가는 프리랜서 외신 사진기자 출신이다.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모두가 스마트폰을 사용해 사진가가 될 수 있는 시대다. 이제 사진은 현장에서 찍는 행위가 아니라 보는, 혹은 보여주는 행위에서 힘이 생긴다”라고 말했다. 이어 “사진이 어떤 조건과 맥락으로, 어떤 조합으로 등장하느냐에 따라 사진은 원래 촬영자 의도와 상관없이 새로운 사건을 만들어낸다”고 강조했다. 이런 생각을 표현한 작업이 ‘랜덤 포레스트’ 연작이다. 랜덤 포레스트는 데이터를 분석하고 예측하는 러닝머신 기법이다. ‘결정 트리’ 모델을 조합해 답변의 착오를 줄여나가도록 설계돼 있다.
찍는다는 게 중요하지 않은 만큼 작가는 직접 찍은 사진과 남이 찍었지만 자신이 고른 사진을 병치해 넌지시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낸다. 가령 2017년 박근혜 탄핵 촛불 시위 장면과 이번 윤석열 탄핵 응원봉 시위 장면을 비슷한 위치에 걸거나 88올림픽 때의 환경미화 사진과 2018년 평창올림픽 때 보기 싫다고 고물상을 가린 사진 등을 병치하는 식이다. 그가 펼쳐놓은 사진의 숲속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잊고 있는 사회적 현실을 각성하게 된다. 11월 2일까지.
‘안티-셀프:나에 대하여’
중견작가 5인 ‘나는 누구인가’ 질문
개인 넘어 사회·집단 초상으로 확장
중견작가 5인 ‘나는 누구인가’ 질문
개인 넘어 사회·집단 초상으로 확장
아르코미술관의 ‘안티-셀프: 나에 대하여’ 기획전에 초대된 강홍구, 김나영&그레고리 마스, 김옥선, 김지평, 하차연 등 중견 작가 5인(팀)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개인적 고백에 머물지 않고 이를 사회적·집단적 초상으로 확장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진작가 강홍구는 1999년 금호미술관 개인전 ‘위치, 속물, 가짜’에서부터 한국 사회의 자본주의 안에 있는 자신을 파악하고자 했다. 개념미술가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는 유용성이 없어진 일상의 물건을 재맥락화해 미술사 속에 위치시킨다. 구멍 뚫린 수석에 금칠한 뒤 추상 조각 거장의 이름을 따 ‘헨리 무어 풍 수석’이라 이름 붙이는 식이다. 사진작가 김옥선은 국제결혼을 한 개인사에서 출발해 한국에 사는 이주 여성, 외국에 사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카메라에 담으며 한국인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묻는다.
재불 작가 하차연은 잠은 지하철 벤치에서 자고, 짐은 가로수에 보관하는 노숙자들의 일시적 정주를 퍼포먼스 형식으로 선보인다. 동양화를 전공한 김지평은 주변부로 밀려난 전통에 주목해 ‘없는 전통’을 새롭게 살려낸다. 산수화 속 장기 두는 신선을 바둑 두는 할머니로 슬쩍 바꿔치기해 21세기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10월 26일까지.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