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에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손들이다. 검은 심연 위에 떠 있어 더 창백한 손들이다. 어떤 손에는 타다 남은 성냥개비가 얹혀 있거나 타다 만 종이가 끼워져 있고, 어떤 손에는 붉은 실, 초록 실이 사연처럼 걸쳐 있다. 전통 안료를 사용해 피부의 솜털까지 선명한 극사실 기법으로 그려졌지만, 이런 알레고리 덕분에 그림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게 만든다.
흑단처럼 검은 안료를 사용하는 일명 ‘블랙 페인팅’으로 유명한 이진주(45) 작가의 개인전 ‘불연속연속’이 서울 종로구 원서동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8년 만의 개인전으로, 초현실적인 성격이 전보다 강해졌다. 즉 인물과 스토리가 더해지며 초현실성이 점층하듯 고조된다. ‘오목한 눈물’에서는 개울에서 겉옷을 벗고 알몸을 드러낸 여인이 등장한다. 그런데 나무는 헐벗었고, 주변엔 흰 눈이 쌓여 있다. 나무에 걸린 배구장 네트. 허공에 매달린 비닐 봉투, 쓰러져 누운 돼지의 살덩이 등 맥락 없는 이미지들이 꿈속처럼 뒤엉켜있다. ‘볼록한 용기’에서는 검은 우주에 유성처럼 떠 있는 돌 위에 나체 여인이 쪼그리고 앉아 있다. 모든 것들이 상식적인 풍경이 아니다.
전시장에서 최근 만난 작가는 “우리가 진짜 보는 풍경은 무엇일까. 이질적인 장면이 뒤섞인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이런 뒤죽박죽의 풍경은 트라우마에서 비롯될 수 있다. 작가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다. 다섯 살 때 정신이상자에게 납치돼 손을 묶였다가 도망쳐 나왔다. 무의식 속에 밀어 넣었던 기억은 우연한 계기로 의식의 표면으로 떠올랐다.
어린이, 여성 등 사회적 약자에게 더 강요되는 위험한 기억들이 어느 날 소환되며 이중의 풍경을 눈앞에 펼쳐놓을 수 있다. 그 비현실적 풍경이야말로 우리의 현실, 진짜 삶이라고 작가는 말하는 듯하다.
한국화를 전공한 작가는 분채와 석채를 쓴다. 이번 전시 작품들이 주는 초현실적인 느낌은 입체감을 내는 유화로 그렸다면 반감됐을 것이다. 전통 안료가 주는 평면적인 느낌, 그 평면성을 한층 강화하는 배경색의 쨍한 블랙이 우리를 초현실 세계로 순간 이동시키는 ‘신의 한 수’ 같다. 10월 9일까지.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