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해병대 동원한 LA 단속과 미시간 공항 입국 거부 등
수차례 이민 단속 경고 사인에 한국 정부와 기업 대비 소홀
대규모 대미 투자 및 관세협상 테이블에서
비자 쿼터 확대 요구하는 게 상식
트럼프 탓하며 책임전가 이전에
안일함부터 반성하고 근본 대책 서둘러야
수차례 이민 단속 경고 사인에 한국 정부와 기업 대비 소홀
대규모 대미 투자 및 관세협상 테이블에서
비자 쿼터 확대 요구하는 게 상식
트럼프 탓하며 책임전가 이전에
안일함부터 반성하고 근본 대책 서둘러야
미국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 공장 구금자들이 우여곡절 끝에 전세기를 타고 곧 귀국한다고 한다. 자진 출국 형식으로 가닥이 잡혀 추후 미국 방문도 가능하다는 관측이 나오지만, ‘전세기 송환’이라는 장면 자체가 사실상 추방에 가까워 자괴감이 앞선다. 무엇보다 이번 사태는 단순히 “미국이 동맹국에 이럴 수 있느냐”거나 “한·미 정상회담에서 500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는데 뒤통수 맞았다”는 식의 감정적 대응으로는 해결될 일이 아니다.
냉정히 따져보자. “전문취업비자가 하늘의 별 따기여서 할 수 없이 90일짜리 관광비자로 일해야 했다”는 변명은 “집 주인이 문을 안 열어줘 담을 넘은 것뿐”이라는 주장과 다르지 않다. 굳이 단속이 심한 미국이 아니더라도 어느 나라든 공항 입국 심사대에서 외국인에게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은 ‘입국 목적’이다. 관광·출장 비자를 소지한 사람이 “일하러 왔다”고 곧이곧대로 말했다가는 당장 조사실 신세다. 기자들조차 취재하러 왔다고 이실직고했다가 곤욕을 치르는 경우도 흔하다.
이번 사건은 트럼프 행정부의 강경 단속을 탓하기에 앞서, 우리가 기본을 소홀히 한 데서 비롯된 뼈아픈 결과다. 경고 신호는 이미 훨씬 전에 울렸지만 한국 정부도, 기업도 이에 대비했다는 흔적을 찾기 어렵다. 지난 6월 미 당국의 이민 단속은 해병대원까지 동원해 한인 밀집지역인 로스앤젤레스(LA)의 의류업체를 필두로 식당·세탁소 등으로 확대됐다. 신분증 미소지자에 대한 무차별 체포도 이뤄졌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장남 트럼프 주니어가 1992년 LA 흑인 폭동 당시의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등 불법 이민 단속에 기름을 부었다. 며칠 뒤에는 미시간 공항과 시카고 공항에서 LG엔솔 엔지니어들의 입국이 잇달아 거부됐고, 일부 장비업체 인력은 유효기간이 남은 전자여행허가(ESTA)가 취소되기도 했다.
미국은 ‘현지 고용 확대’ 원칙에 따라 H-1B, L-1 등 비이민 취업비자에 높은 쿼터 장벽과 엄격한 심사 절차를 두고 있다. 그 공백을 ESTA·B1으로 메우는 관행은 언제든 ‘불법 취업’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이는 비자 위반을 넘어 불법 취업자라는 이유로 임금을 착취하는 다단계 고용에 따른 노동분쟁으로 비화할 위험까지 안고 있다.
이런 삼엄한 분위기에서 발생한 이번 무더기 구금사태는 미 이민·노동 집행 환경의 구조적 변화를 과소평가했거나, “거액을 투자한 우리를 단속하겠느냐”는 무사안일의 결과물이다. 미 당국이 지난 5일 조지아 현지를 급습한 뒤 익명 직장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올라온 한 LG엔솔 직원의 글은 현장 대비 수준을 여실히 드러낸다. 글에 따르면, 사건 당일 현대차 측은 단속 가능성을 사전에 인지하고 협력사 직원들의 출근을 막았던 반면, LG엔솔 직원들은 현대차 부사장의 라인 투어 일정에 맞춰 모두 출근했다가 쇠사슬에 묶여 구금되는 신세가 됐다.
트럼프 특유의 거칠고 일방적인 카우보이식 행태를 모를 리 없는 대통령실이 “과도한 단속” “부당한 침해”라 반응한 것은 책임 전가처럼 들린다. 이보다는 정부가 그간 무엇을 했는지 스스로 따져 묻는 게 순서일 듯싶다. 사전에 제도적 출구를 마련할 노력을 했는지부터 반성해야 한다. 싱가포르가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전문직 전용비자(H-1B1 트랙)를 확보한 사례는 널리 알려져 있다. 5000억 달러의 대미 투자를 전제로 관세·보조금을 논했다면, 같은 테이블에서 핵심 기술인력 이동을 위한 별도 비자 트랙·쿼터·심사 간소화를 함께 요구하는 게 상식이다. 나아가 이번 사태는 단순히 불법체류 단속 차원을 넘어, 한국 기업의 글로벌 확장 전략과 미국의 노동 정책이 충돌한 결과라는 점에서 비자 쿼터 확대만으로는 근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수 있다. 이를 위해 한국 기업들은 직접 고용, 파견 하도급 등 다층적 인력 운영 체계를 재점검해야 한다. 정부는 한·미 산업협력 양해각서에 ‘전문기술인력 이동 챕터’를 별도로 둬 상시 채널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대규모 대미 투자와 관세 협상의 의미가 퇴색하지 않으려면, 미국의 제도를 몰랐거나 애써 무시한 우리의 안일함부터 고쳐야 한다. 징후를 읽고 대응하는 능력, 그것이 글로벌 생산기지 시대의 국가 경쟁력이자 기업 경쟁력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분노의 수사(修辭)가 아니라 준법·외교·운영이 맞물린 실행 플랜이다.
이동훈 논설위원 d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