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여성의 알바 생활] 칼잡이 언니들

입력 2025-09-13 00:33

인력 알선업체를 통해 공장 알바를 나간 곳은 주로 의류 포장 공장이었다. 장마철에 일이 없다가 끝나자 다시 연락이 왔다. 사실 여름에는 의류 포장 일이 많지 않다. 당연히 사람들이 옷을 여름에는 적게 입고 겨울에는 많이 입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름에 인기 있는 의류가 있다. 여자 속옷. 알선업체 연락을 받고 한여름에 나간 공장은 유명한 브랜드의 여성 속옷을 포장하는 곳이었다. 레이스가 달린 섹시한 브래지어와 속이 들여다보이는 손바닥만한 팬티, 하늘하늘한 란제리를 포장했다. 하얀색, 붉은색, 검은색 등등 일하면서도 눈이 즐거웠다. 게다가 다들 깃털처럼 가벼워 하루 종일 서서 일하면서도 흥흥 콧노래가 나왔다. 당연히 여름에 여자들은 속옷을 많이 갈아입으니 이 공장은 늦봄부터 시작해 한여름이 가장 흥행기였다.

공장 안에는 에어컨이 돌아가지 않았다. 공간이 학교 운동장만큼 넓고 천장은 높은데 웬만한 에이컨으로는 찬공기가 닿지 않았다. 대신 작업대 근처에만 산업용 에이컨을 놓았다. 사장님은 10명쯤 일하는 알바들이 더위에 쓰러질까봐 1시간마다 휴식 시간을 줬다. 이곳은 알바 아줌마들의 최애 일터였다. 인력 알선업체에 청탁을 넣어 서로 보내 달라고 부탁을 했다. 하지만 업체는 골고루 돌아가며 알바들을 보냈다. 나도 여기에 가는 일이 즐거웠다. 그곳에서 오래되고 숙련된 칼잡이 언니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60대에 가까운 언니들은 칼솜씨가 뛰어났다. 홈쇼핑으로 나가는 속옷 세트를 구성해 포장하기 위해서는 창고에 쌓인 재고 박스를 열어 포장된 속옷들을 꺼내야 한다. 박스를 따야 하는 순간 언니들은 일제히 앞치마에서 칼을 뽑아 든다. 이때 칼을 잘 휘둘러야 했다. 단단히 묶여진 종이 박스에 칼을 꽂을 때면 한 번에 빠르게 찢어지면서도 안에 들어 있는 속옷 포장이 뜯기지 않게 기술을 써야 했다. 적절한 힘 배합과 손목을 꺾는 시점이 중요하다. 또 속도도 빨라야 고수가 된다. 오직 경험이 쌓여야 나오는 기술이다.

칼의 상태도 중요하다. 공장에도 준비된 칼들이 있지만 칼잡이 언니들은 스스로 구한 칼들을 앞치마에 넣고 다녔다. 주로 사무용 커터칼로 심이 날카로우면서도 단단해야 한다. 또 손으로 잡았을 때 적절한 힘이 들어가도록 잡는 느낌도 좋아야 한다. 나도 개인용 칼을 준비했다. 내 손에 맞는 칼을 찾기 위해 문방구에서 이런저런 칼을 만져 보고 느낌이 좋은 칼을 샀다.

공장에서 언니들은 칼을 휘두르는 힘과 각도, 속옷 포장이 찢어지지 않도록 손목을 꺾어 줘야 하는 시점 등을 내게 가르쳐 줬다. 사장님은 여사님들이 킬러 같다고 웃었다. 공장에서 우리는 협력해 일을 했다. 고참 언니들은 찬찬히 기술을 가르쳤고 우리는 포장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내 작업 순서를 고안하고 작업대 위치를 바꿨다. 공장은 창고가 많아 사장님은 아침에 일을 맡기면 퇴근 때나 돼야 들어왔는데 우리는 항상 목표를 초과 달성해 놓고 기다렸다. 가을이 되자 그곳에 다시 나갈 수 없어 아쉬웠다.

김로운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