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윤의 딴생각] 소시민의 이탈리아 여행법

입력 2025-09-13 00:32

수년 전 한 친구가 프랑스 파리로 여행을 가자고 했다. 그것도 한 달가량을 말이다. 며칠쯤 고민하다가 파리행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내 집, 그중에서도 이불 속을 좋아하는 나이기에 이번 기회가 아니면 파리 구경을 할 일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파리는 별로였다. 모나리자를 보러 갔지만 사람이 바글바글한 탓에 세계 각국 사람들의 뒤통수만 구경했고, 유명하다는 어느 제과점 케이크는 ‘파리바게뜨’보다 한 수 아래였으며, 샹젤리제의 개선문은 서대문의 독립문과 다를 게 없었다. 개중에서 가장 실망스러웠던 건 동네 개천만 한 센강이었다. 시시하기 짝이 없구먼. 나는 한강의 나라에서 왔다, 이거야!

하지만 파리는 꼭 그만큼 좋았다.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들려오던 아코디언 선율과, 배고파하는 반려견에게 주머니에서 꺼낸 마들렌을 양보하던 노신사와, ‘장자크 상페’의 그림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처럼 빈틈없이 풍요로운 거리의 모습까지.

낯선 이국의 풍경을 마주할 때마다 새로운 자극이 쉴 새 없이 느껴졌다. 그 사이사이 고국의 소중함을 느낀 건 당연지사고 말이다. 표현이 다소 거창하기는 하지만 여행을 하며 일종의 성장을 겪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별로이면서도 좋았던 기억이 가득한 파리에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 그리하여 이불 밖으로 빠져나올 기회를 틈틈이 엿보는 요즘이다.

동행이 있다면 여행을 실행으로 옮기는 데 탄력이 붙을 것 같았다. 항공사 고객센터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여행 이야기를 넌지시 꺼내 보았다. 그녀에게는 회사에서 제공하는 무료 항공권도 있으니 여행이 그리 부담스럽지 않을 터였다. 친구는 여행을 갈 생각이 있기는 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있다고’가 아니라 ‘있기는 하다’고 말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상담을 하면서 곤란한 상황에 처한 여행객의 모습을 너무나 많이 봐서인지 먼 나라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크게 들지 않는다고 했다. 블랙박스 영상을 보며 시시비비를 가리는 교통사고 전문 변호사 한문철이 운전을 하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장을 담그려면 구더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말로 친구를 설득해 보려다가 이내 마음을 접었다. 돈, 그놈의 돈 때문이었다. 무료 항공권 따위는 구경도 해본 적 없는 나이기에 항공료는 물론 숙박비에 식비까지 내 돈으로 지불해야 한다. 게다가 여행하는 동안 일하지 못하는 기회비용까지 생각한다면 금전적 손해는 곱절로 늘어난다. 일이라는 고행을 감내한 자만이 쉼이라는 여행을 떠날 수 있는 법. 아쉽지만 여행은 먼 훗날로 미뤘다.

그러나 친구와의 만남은 미룰 이유가 없기에 이따금 만나 회포를 푼다.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그녀와 내가 하는 일탈이라고는, 건강에 나쁜 아이스크림을 만날 때마다 하나씩 사먹는 것뿐이다.

얼마 전에도 친구와 나는 아이스크림 집을 찾았다. 우리는 젤라토가 먹음직스럽게 올라간 콘을 손에 쥐고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친구가 대뜸 이런 소리를 해왔다. “아니, 뭐. 해외여행 갈 필요가 따로 있어? 젤라토 먹으면 여기가 이탈리아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말투였다. 그것은 바로 우리네 아버지가 즐겨 쓰는 문장이었다. 변형 문장으로는 “비싼 옷 입을 필요가 따로 있어? 깨끗하게 빨아 입으면 그게 명품이지”라든지 “큰 집에 살 필요가 따로 있어?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뜨뜻하면 그게 궁궐이지” 등이 있다. 현실을 바꿀 수 없으니 생각을 바꿔 팍팍한 일상을 견뎌낸 아버지들의 지혜와 그 태도를 물려받은 내 친구가 나는 참 좋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를 또다시 만났다. 나는 미리 만들어 둔 여행 일정표를 친구에게 건넸다. 1차 방문 국가, 미국, 커피 한잔의 여유 즐기기. 2차 방문 국가, 인도, 요가원에서 고강도 수련하기. 3차 방문 국가, 일본, 회전초밥 먹기. 우리는 반나절 동안 3개국을 도는 걸로도 모자라 이탈리아까지 방문하는 기염을 토했다. 여행의 대미는 젤라토로 장식해야 제맛이니 말이다.

그런데 사고가 일어나고야 말았다. 친구가 한눈을 파는 바람에 젤라토가 바닥으로 뚝 떨어져 버린 것이다. 친구는 텅 빈 콘을 보며 울상을 지었다. 현실을 바꿀 수 없었다. 하지만 생각을 바꿀 수는 있었다. “아이스크림 소매치기당했다!” 나의 호들갑스러운 외침에 친구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대꾸했다. “하여튼 이탈리아는 이게 문제라니까!”

이주윤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