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숭늉과 시리얼

입력 2025-09-10 00:33

밤 11시가 되니 어김없이 출출했다. 습관처럼 시리얼을 그릇에 담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하필 우유가 다 떨어지고 없었다. 이미 그릇에 시리얼을 넣은 상황이라 어떡하지 싶었다. 문득 어젯밤 끓여 먹다 남은 숭늉이 떠올랐다. 누룽지를 사 놓고 가끔 밤이면 숭늉으로 끓여 먹었다. 숭늉이 구수하므로 조합이 괜찮을 것 같아 잘 데워 시리얼에 부었다.

그런데 웬걸? 낯설고 이상한 맛이었다. 숭늉의 구수함과 시리얼의 단맛이 어울리기는커녕 서로의 매력을 갉아먹었다. 시리얼이 숭늉에 녹아 퍼질수록 더욱 이상한 맛이 났다. 우유와 시리얼이 만나면 고소함이 배가되지만 숭늉과 시리얼은 서로의 맛을 망가뜨렸다. 숭늉 탓을 할 수도 시리얼을 탓할 수도 없었다. 그저 잘못 섞였을 뿐이었다. 아까운 마음을 접고 버려야 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인간관계도 비슷해 보인다. 어떤 사람은 함께 있으면 즐겁고 힘이 나는데 어떤 사람은 대화를 나눌수록 감정만 상한다. 상대방이 나를 해친 것도 아니건만 함께 있다 보면 어느새 상처를 받는다. 꼭 누구 잘못이랄 것도 없다. 그냥 서로 맞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전혀 맞지 않는 줄 알면서도 끊지 못한다. 왜일까. 미안한 감정이나 괜한 죄책감, 혹은 ‘내가 참지’ 하는 착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이미 함께한 시간과 정을 포기하는 것이 아까워 더 큰 손실을 감수하면서 관계를 이어가려는 마음도 있을 터이다. 이른바 손실 회피 성향이다. 그러나 관계는 쌍방향이기에 상처만 주고받는 관계는 서로를 더 외롭게 만든다. 나를 지치게 하고 내 삶의 에너지를 계속 갉아먹는 관계라면 그것은 분명 독이다.

물론 관계를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진심으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은 중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서로를 지치게 만든다면 잘 끊을 줄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단절이 아니라 서로의 고유한 삶을 지켜 주는 또 다른 방식의 배려다. 관계에서는 함께 있을 때 서로의 고유한 맛을 살려주는지가 중요하다.

공자는 ‘논어’에서 “도가 다르면 함께 일을 도모해선 안 된다(道不同不相爲謀)”라고 했다. 인생의 방향과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면 함께하는 것이 서로를 해롭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억지로 맞춰가면서 관계를 유지하면 서로가 지친다. 맞지 않는 관계는 잘 정리하는 것이 삶의 질을 높이는 길이다. 나의 평화를 빼앗는다면 과감히 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

쇼펜하우어는 고슴도치의 딜레마를 들려준다. 추운 겨울 고슴도치들이 체온을 나누기 위해 가까이 다가간다. 하지만 곧 서로의 가시에 찔려 고통을 느끼고 떨어져 버린다. 너무 멀리 있으면 추워서 괴롭고 너무 가까이 있으면 서로의 가시에 상처를 입는다. 결국 고슴도치들은 적당한 거리를 찾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외롭다고 무조건 가까이 붙으려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인간은 본래 결점이 많은 존재라 너무 가까이 다가서면 상처만 주고받을 수 있다. 관계의 지혜는 알맞은 거리를 아는 데 있다. 맞지 않는 관계는 과감히 정리하고 그 자리에 진정으로 소중한 사람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야 인생이라는 식탁에서 진정으로 맛있는 관계의 음식을 즐길 수 있다.

시리얼은 우유를 만나야 제맛을 내듯 인간은 각자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관계가 있다. 숭늉과 시리얼처럼 서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면 과감히 끊는 것이 좋다. 단순히 불편한 사람을 떼어내라는 게 아니라 삶의 방향을 재조정하고 더 좋은 관계에 집중해 삶의 질을 더 높이라는 의미다. 관계의 지혜는 무엇을 붙잡을지 잘 아는 것뿐만 아니라 무엇을 놓아야 할지를 잘 아는 데 있다.

박수밀 고전학자·한양대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