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자 출장 관행’ 때린 美… “비자 안 내주면서 투자 압박”

입력 2025-09-08 02:04
지난 6월 서울 종로구 주한 미국대사관 앞에서 시민들이 비자 심사를 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다. 뉴시스

미국 이민 당국이 지난 4일(현지시간) 조지아주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을 급습해 한국인 직원 300여명을 체포한 것은 이들 중 상당수가 현지 공장에서 일하는 데 필요한 비자를 소지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일하려면 정식 취업 목적 비자가 필요하지만 현실적 제약 탓에 상당수 한국 기업은 직원을 미국에 출장 보낼 때 무비자인 전자여행허가(ESTA)나 단기상용(B-1) 비자를 통했다. 이번 사태는 미 정부가 이런 관행에 돌연 칼을 대겠다고 나서면서 발생했다.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은 7일 “유사 사례 방지를 위해 대미 프로젝트 관련 출장자의 비자체계 점검 및 개선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근로 활동을 하려면 전문직 취업(H-1B) 비자나 주재원(L-1) 비자를 발급받아야 한다. 그러나 발급 요건이 까다롭고 기간도 최소 수개월 걸려 기업 입장에선 매번 신청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H-1B 비자는 연간 발급 건수가 8만5000개로 제한돼 있는데 한국은 쿼터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ESTA나 B-1 비자를 이용한 출장이 관행처럼 굳어진 배경이다. ESTA는 최대 90일, B-1 비자는 일반적으로 최대 6개월의 체류기간이 주어지지만 미국 내 근로활동은 금지된다.

이런 편법적 비자 관행은 대미 투자와 고용 창출이 활발했던 시기엔 어느 정도 묵인됐던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반이민 정책 기조와 맞물려 기류가 바뀌었다. 실제로 지난해 말부터 ESTA로 출장을 간 한국 기업 직원들이 현지 공항에서 입국이 거부되는 등 심상치 않은 징후가 나타나기도 했다. 여기에 조지아주 건설 노조는 6개월 전 해당 공장이 미국 노동자를 채용하지 않고 한국인들이 단기 비자로 들어와 일하고 있다며 당국에 신고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ESTA나 B-1 비자를 통한 현지 근무를 이어온 것은 안일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업계에선 미 정부가 대미 투자를 압박하면서 정작 공장 건설과 운영에 필요한 비자 발급은 해 주지 않는다는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다. 동시에 그간 기업들이 해당 문제 해결을 호소했음에도 한국 정부 대응이 미온적이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업계 관계자는 “공장 가동 시점은 맞춰야 하는데 현지에서는 숙련 인력을 채용하기 어렵고 한국인 직원에 대한 정식 비자는 안 나오는 답답한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대미 투자를 결정하는 단계에서부터 현지 정부와 비자 문제를 협의해 이를 합의 사항에 명시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한국인 전용 취업비자(E-4) 신설을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미국이 호주(연간 1만500개), 싱가포르(연간 5400개) 등 자유무역협정(FTA) 상대국에 할당하는 전용 취업비자를 한국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권지혜 허경구 기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