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주의 통했나… 불경기에도 판매는 더 강세

입력 2025-09-08 01:21
지난 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 ‘프리즈 서울 2025’ 아트페어를 찾은 관람객들이 하우즈앤워스 부스 앞을 지나고 있다. 뒤로 보이는 마크 브래드퍼드 3점 연작 블루 추상화는 개막 첫날인 3일 아시아 컬렉터에게 프리즈서울 사상 최고가인 62억원에 팔렸다.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초대형 아시아 아트페어 ‘프리즈 서울’과 ‘키아프’(한국국제아트페어)가 지난 3일 나란히 개막해 각각 6일과 7일 막을 내렸다. 한국화랑협회와 영국 프리즈가 손잡고 4년째 여는 ‘키아프리즈(키아프+프리즈) 2025’를 결산한다.

실용주의 전략이 통했나. 세계 정상급 갤러리들이 참여한 프리즈 서울은 올해 환호성을 질렀다. 경기 침체로 부진할 거라는 예상을 깨고 역대 최고가를 갱신했다. 48개국 160여 미술관·기관 관계자 등 7만여명이 찾으며 갤러리마다 “스트롱 세일즈”(판매 강세)를 외쳤다.

불경기에 62억원 역대 최고가 탄생…미술관 전시 병행 ‘붐업’

세계 5대 ‘메가 갤러리’인 하우저앤워스에서 출품한 미국 흑인작가 마크 브래드퍼드의 삼면화 형식 추상화가 450만 달러(약 62억원)에 아시아 컬렉터에게 팔리며 프리즈 서울 사상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하우즈앤워스는 한국에 지점이 없다. 그럼에도 브래드퍼드(아모레퍼시픽미술관), 페미니즘 대모 루이스 부르주아(호암미술관), 한국 여성 작가 이불(리움미술관) 등 전속 작가들이 페어 기간 한국의 대표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며 인기몰이를 했다. 이불의 회화(약 4억원)와 조각(약 5억6000만원), 루이스 부르주아의 회화(13억2000만원)와 조각(8억3000만원) 등이 줄줄이 팔리며 첫날만 총 120억원의 판매고를 올렸다.

프리즈 서울에 참가한 화이트 큐브 부스. 정면에 보이는 게오르그 바젤리츠의 회화 역시 개막 첫날 약 21억원에 판매됐다.

화이트 큐브는 독일 표현주의 작가 게오르그 바젤리츠 회화(130만 유로, 약 21억원), 영국 조각가 안토리 곰리의 조각(4억7000만원), 트레이시 에민의 조각(4억1300만원) 등을 판매했다. 타데우스 로팍 갤러리에서도 바젤리츠 회화(23억3000만원), 미국 팝아트 거장 알렉스 카츠 회화(90만달러, 약 12억5000만원) 등이 거래됐다. 거장부터 터너상 후보에 오른 한국계 제이디 차와 한국의 정희민 등 30·40대 작가의 작품도 1억원 안팎에 팔리며 고른 성과를 보였다. 뮤지엄산에서 개인전이 한창인 곰리는 화이트큐브와 타데우스 로팍 공동 전속인데, 갤러리에 전시 중인 작품도 다수 판매된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 메이저 갤러리들도 성적이 좋았다. 국제갤러리가 선보인 박서보(7억5000만원), 하종현(3억2000만원) 등 단색화 작가 회화를 비롯해 여성 원로 김윤신의 조각과 회화, 함경아의 ‘자수 추상화’ 등이 팔렸다. 리안갤러리도 일본 작가 토마카츠 마츠야마(3억원)와 이진우(8300만원)의 회화를 비롯해 김근태, 애나 팍 등 한국(계) 작가들의 작품을 거의 다 판매했다. 근대 거장을 소개하는 ‘프리즈 마스터스’ 섹션도 인기를 끌었다. 학고재갤러리는 첫날 김환기 추상화 소품(20억원)과 재독 작가 송현숙의 추상화(1억2000만원) 등을 판매했다.

한국 갤러리 ‘마의 숫자 30’ 효과 있네

프리즈 서울 ‘프리즈 마스터스’ 섹션에 참가한 학고재갤러리의 김환기의 비구상화.

프리즈 서울에는 매년 110∼120곳의 갤러리가 참가한다. 이 가운데 한국 갤러리는 그간 12∼18곳에 불과했으나 올해는 30곳으로 대폭 늘었다. 글로벌 경기 침체와 한국의 계엄 사태 여파로 일부 해외 갤러리들이 불참하면서 생긴 빈자리를 한국 갤러리들이 메운 것이다. 이 때문에 해외든 국내든 메이저 위주였던 프리즈 서울의 위상이 흔들릴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다.

결과는 달랐다. 피비갤러리, 디스위켄드룸, 갤러리2 등 유망한 신진작가를 소개하는 강소 갤러리 10여곳이 합류하면서 프리즈 서울의 한국 작가 스펙트럼이 근대 거장에서 생존 원로와 신진까지 아우르며 다양해지는 효과를 냈다. 1층 키아프에 내려가지 않고도 3층 프리즈에서 ‘한국 작가 원스톱 쇼핑’이 가능해진 것이다. 특히 디스위켄드룸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신진작가 발굴 프로그램 ‘젊은 모색’에 나온 김진희 등의 작품을 선보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살아 있는 거장 중심… 50만 달러 이하 시장 안착?

첫해 피카소 걸작(600억원) 등 해외 미술관에서나 볼 수 있던 20세기 근대 미술 거장을 내세우던 모습은 자취를 감췄다. 무라카미 다카시(63), 안토니 곰리(75), 마크 브래드퍼드(64), 루이스 부르주아(1911-2010) 등 21세기 동시대 거장을 중심으로 한 실용적 라인업이 시장의 주류로 안착하는 분위기다.

프리즈 서울 2025의 판매 강세를 두고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사이먼 폭스 프리즈 CEO는 5일 기자간담회에서 “이해관계자들을 한데 모아 에너지를 만들어낸 데에 배경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미술관 전시 인프라, 작가 스튜디오 방문, 삼청나이트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축제 무드를 조성한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새로운 수요를 창출했다는 분석이다.

타데우스 로팍 관계자는 “한국 주요 미술관뿐 아니라 일본, 대만, 태국, 그리고 미국과 유럽의 컬렉터들에게 작품을 판매했다”며 컬렉터 국적이 다양해지는 분위기를 전했다. 화이트 큐브 아시아 담당자 웬디 슈는 “동시대 해외 작가에 관심을 두는 한국 컬렉터들도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초고가 정책을 버리고 50만 달러 이하 전략을 편 것도 주효했다. 페이스 갤러리 관계자는 “작년보다 실적이 좋다. 올해는 50만달러(약 6억9000만원) 이하 작품만 가져왔다. 한국의 컬렉터들에게 거의 다 팔렸다”고 전했다. 페이스 갤러리는 첫날만 미국 작가 메리 코스 회화 22만5000달러(약 3억1300만원), 팝아트 거장 로버트 인디애나 조각 19만5000달러(약 2억7100만원) 등 약 31억원 규모의 매출을 올렸다.

또 강소갤러리를 통해 1000만원대 신진 작가의 작품까지 포진하면서 시장 저변을 넓혔다는 분석이 나온다. 갤러리 조선에서는 영국 컬렉터가 우민정, 최수련 등 30대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한꺼번에 사 갔다.

글·사진=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