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기대감 없는 제80차 유엔총회

입력 2025-09-08 00:38

유엔은 1945년 출범 당시 제3차 세계대전 억제를 가장 중요한 임무로 부여받았다. 유엔 창설을 주도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2차 대전의 전시동맹국인 소련과 안전보장이사회를 구성하면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회원국들 병력을 모아 유엔군을 설립하면 새로운 적을 쉽게 제압하는 것은 물론 국제 협력도 끌어내 경제 부흥도 일으킬 것이라고 루스벨트는 믿었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유엔 출범 전 사망했고, 이후 회원국들은 편을 갈라 싸우기 시작했다. 당장 안보리의 투톱인 미국과 소련이 이념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며 국제사회를 냉전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었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은 유엔 초창기 회의마다 거부권을 행사해 국제 합의를 번번이 무산시켰다. 1950년 무렵만 해도 유엔의 운명은 전신인 국제연맹처럼 해체 수순에 들어갈 것으로 전망됐다. 스웨덴 외교관 출신 다그 함마르셸드가 1953년 제2대 사무총장으로 선출되면서 유엔에 대한 국제사회의 기대도 달라졌다. 함마르셸드는 19세기 나폴레옹 전쟁 이후 중립국 지위를 유지했던 스웨덴 국적자로서 어느 국가와도 대화할 수 있는 교섭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유엔 회의가 교착 상태에 빠질 때마다 중재자로 나서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이후부터 유엔 총장은 평화의 중재자로 여겨졌다. 3대 총장인 우탄트(미얀마)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의 극적인 합의를 끌어내어 세계를 핵전쟁으로부터 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5대 총장인 하비에르 페레스 데 케야르(페루)의 임기였던 1991년에는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 회원국 지위를 얻었다.

하지만 포르투갈 총리를 지낸 안토니우 구테흐스가 현직 9대 총장을 맡은 2017년부터 유엔에 위기가 닥쳤다. 운이 없게도 구테흐스의 임기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집권 1기와 함께 시작됐다. 당시 미·중 무역 전쟁으로 혼란에 빠진 국제사회는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까지 겪으며 분열을 시작했다. 2022년에는 우크라이나 전쟁, 2023년에는 가자지구 전쟁이 줄줄이 발발했다. 트럼프는 올해 백악관으로 다시 돌아와 미국의 관세 장벽을 높였고, 다시 시작된 혼란을 틈타 북·중·러는 반미 전선을 구축했다.

9일 개막하는 제80차 유엔총회는 구테흐스가 총장으로서 사실상 마지막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무대다. 그의 임기 마지막 해인 2026년 총회에선 후임 총장이 선출되기 때문이다. 올해 총회에는 트럼프는 물론 이재명 대통령(이상 23일)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24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26일) 등 무역 갈등과 지정학적 위기의 당사국 정상들이 연달아 연설한다. 시리아 정상으로는 58년 만에 아메드 알샤라 임시 대통령의 연설도 예정돼 있다. 2020년대 들어 가장 주목도 높은 유엔총회가 열리는 셈이다. 하지만 구테흐스가 존재감을 보여줄 가능성은 이번에도 희박하다.

차기 총장 선출 과정에서 트럼프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저마다 입김을 강하게 불어넣으려 한다면 유엔의 위상은 더 흔들릴 수밖에 없다. 유엔헌장에 따르면 신임 총장은 안보리 추천과 총회 인준을 거쳐 결정되지만 안보리 상임이사 5개국 중 하나라도 거부권을 행사하면 선임될 수 없다. 우탄트의 외손자인 역사학자 탄트 민우는 파이낸셜타임스에 “유엔 총장 선출은 상임이사 5개국이 결정한 후보를 나머지 회원국들이 도장만 찍어주는 절차와 같다”며 “다음 총장을 잘못 뽑으면 유엔의 종말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엔의 종말은 80년 전 출범하면서 부여받은 가장 중요한 임무도 사라진다는 얘기가 된다.

김철오 국제부 차장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