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윤석열과 자유, 부자유

입력 2025-09-08 00:32

얽매이지 않으려 ‘제거’라는방식 택한 尹…
입지 좁아져 급기야 불법 계엄으로 끝나

자유란 뭘까. 윤석열 전 대통령이 시도 때도 없이 “자유”를 소리치는 모습을 보며 궁금했다. 누군가 내게 “자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버버댈 것만 같다. 어찌어찌 답한다 해도 후속 질문 몇 개에 다시 말문이 막힐 것이다. 민주주의, 정의, 국민주권 따위도 마찬가지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구체적 의미를 질문받고서야 ‘어렴풋이 짐작만 해왔구나’ 하고 다시 더듬어 보는 말들.

자유의 사전적 정의는 ‘외부적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다. 하지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처럼 단편적으로, ‘특정 정파의 것’처럼 왜곡되게 이해한다면 자유는 그만큼 납작해지고 곡해될 것이다. 그런 자유는 대개 ‘힘센 사람(기득권)의 자유’로 귀결된다. 소수자를 향한 희화화와 혐오 발언을 표현의 자유라고 맹렬히 우기면서도 윤 전 대통령이 방조한 ‘입틀막’은 애써 외면한 이들을 나는 종종 떠올린다.

자유라는 거대한 단어, 개념, 담론을 설명할 능력이 내겐 없다. 그저 하나의 방법론 정도만 곱씹을 뿐이다. 일본의 동시통역사이자 작가였던 요네하라 마리가 책 ‘교양노트’에 쓴 자유라는 이름의 부자유다.

요네하라의 한 건축가 친구는 “결점 없는 땅에 건축가 마음대로 집을 지어 달라는 게 제일 골치 아픈 법”이라고 말했다. 외려 결점투성이 땅에 땅 주인이 무리한 요구를 할수록 걸작이 지어진다고.

요네하라의 해석은 이렇다. “자유가 주어지면 자기가 가장 하기 쉬운 것으로 타협하고 만다. 수비 범위가 좁아지고 늘 같은 부분을 맴돈다. 동작 하나하나에 세세하고 엄격한 형식이 있고, 몸에 익히는 데 몇 년이 걸리는 등 부자유를 느끼며 배운 춤일수록 자기표현도 마음껏 할 수 있다. 형식을 익히는 과정에서 몰랐던 동작을 알게 되고, 쓰지 않던 근육을 능숙히 움직이게 되면서 자유의 범위가 어느새 확대됐음을 깨닫는다.”

한국에 알맞은 사례가 있다.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의 송은문화재단 사옥 ST송은빌딩. 이 건물은 빽빽이 들어선 강남의 네모난 저층 빌딩들 사이에서 날카로운 삼각형 형태로 시선을 압도하며 랜드마크가 됐다. 단순한 디자인 실험이 아니다. 고도제한, 대로변 기준 전면 5m 이격, 측면 3m 및 차량 진입로 6m 확보, 일조권 사선제한 등 까다로운 규제에 대한 건축가들의 답이었다. 이들은 한 인터뷰에서 “주어진 규제를 장애물로 보지 않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다룰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다시 윤 전 대통령과 자유를 생각한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부자유를 참지 않았다. 얽매이지 않으려 눈앞에서 ‘제거’하는 편한 방법을 애용했다. 국정 기조를 비판하는 야당 정치인도, 연구개발(R&D) 예산 복원을 외친 카이스트 졸업생도 입을 틀어막았다. 비판적 언론은 대통령 전용기 탑승을 배제하거나, 대통령실에서 퇴출했다. 여당 대표라 하더라도 쓴소리하면 축출했다.

부자유를 제거해 자유로워지려 할수록 그의 자리는 협소해졌다. 김건희 여사와 관련된 각종 의혹, 명태균 게이트 등에 대한 해명·사과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더 커졌다. 윤 전 대통령이 이를 거부하고 탐닉한 곳은 달콤한 말만 들렸을 극우 유튜브였다. 그러곤 급기야 불법 계엄을 저질렀다. 그는 계엄 선포문에서도 정체 모를 ‘자유’를 12번 읊었으나, 헌법과 국민 앞에 저지당했다.

기실 윤 전 대통령이 불편해한 부자유란 민주적 제도와 관습, 형식이었다. 결과는 어떤가. 그는 지금 자유로운가. 체포영장 집행에 불응하기 위해 속옷 차림을 택하는 자유가 정녕 자유인가.

자유는 타자 없이 성립할 수 없다. 나 홀로인 세상에서 자유는 무의미하다. 동시에 타자의 존재는 내 자유의 침해 가능성, 즉 부자유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너와 나의 자유’라는 지난한 미션은 ‘타인이라는 부자유’를 인정하고 그 한계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강구하는 과정인지 모른다. 비단 윤 전 대통령에게만 적용될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권중혁 산업2부 기자 gre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