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살림 단상

입력 2025-09-06 00:39

결혼을 하고 살림살이가 크게 늘었다. 1인에서 2인 가구가 됐으니 당연한 일이다. 남편이 자취하며 쓰던 물건은 신혼집에 어울리지 않거나 낡은 것이 많아 반 정도는 비워야 했다. 세종에 살던 나 역시 본가 세간살이를 빌려와 조촐하게 생활했던 터라 신혼살림은 대부분 새 제품으로 채워졌다.

침대처럼 커다란 가구부터 접시 하나, 숟가락 하나까지 우리 부부의 첫 살림이라는 의미를 담아 정성껏 골랐다. 그렇게 이것저것 장바구니에 담을 때에는 자각하지 못했는데 새 냉장고가 집에 배송되는 날 ‘아차’ 싶었다. 이제 이 커다란 냉장고를 채우는 것도 우리 부부의 몫이구나. 어떤 재료로 어떤 음식을 언제 먹을지까지 온전히 두 사람이 결정해야 하는구나. 그러한 현실이 훅 와닿으며 평범한 냉장고가 유독 커 보였다. 살림의 주인이 된다는 건 그만큼의 책임이 더해지는 일임을 어렴풋이 느낀 것이다.

결혼 초기에는 집안 꾸미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가재도구나 생필품을 갖추고 나니 집안 분위기를 바꿔주는 조명, 그림 같은 장식품에 눈길이 갔다. 신혼이라는 단어가 주는 특별한 느낌처럼 신혼집도 그 이름에 걸맞은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인테리어 쇼핑몰을 드나들고, 틈만 나면 집안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어떤 물건을 놓을까’ 고민했다. 모델하우스처럼 대단한 인테리어는 아니더라도 두 사람의 취향이 담긴 우리만의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퍽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얻었다고 느꼈을 때, 새 냉장고를 마주한 그날의 깨달음이 다시 떠올랐다. 우리에게 주어진 살림의 크기가 곧 책임의 크기라는 사실 말이다.

아무리 멋진 인테리어를 하고 값비싼 물건을 들여도 사람이 생활하는 집에는 먼지가 쌓이기 마련이다. 샤워를 하면 물기가 남고 외출을 하면 빨랫감이 생긴다. 음식을 먹으려면 장보기부터 요리, 설거지, 쓰레기 비우기 같은 수고가 당연하게 뒤따른다. 휴지, 치약, 세제 같은 비품을 제때 채워 넣는 일부터 고장난 전등을 갈거나 삐걱이는 문을 보수하는 일까지, 살림을 관리한다는 건 참으로 광범위한 집안일과 반복적인 노동을 수반한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자랑할 수도 없지만 행하지 않으면 반드시 티가 나는 생활 노동이다.

부모님이 살림을 꾸리는 모습을 수십년간 보았고 주위에 독립하거나 자녀를 낳은 친구도 많은데 막상 본격적으로 ‘내 살림’을 도맡으려니 어쩐지 자신이 없었다. 잔뜩 불어난 세간살이가 내 손에서 각자의 쓰임과 가치를 다할 수 있을지 지레 걱정이 됐다. 사는 모습의 정답이 없고 살림을 누군가에게 내보일 일도 없지만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부담감이었다.

결혼생활에 익숙해지며 싱크대에는 종종 빈 그릇이, 욕실에는 머리카락이, 거실에는 널브러진 옷가지가 슬그머니 자리잡았다. 냉장고에선 완전히 잊혀져 까맣게 변해버린 야채들이 나오기도 했다. 심란한 마음에 살림 고수라는 인플루언서 계정을 팔로우하기도 하고, 집안일 노하우를 다룬 영상을 찾아보기도 하다 정리 전문가인 곤도 마리에의 서적까지 가닿았다.

정리·수납 컨설턴트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마리에는 설레지 않는 물건은 과감히 버리라는 정리 철학으로 유명하다. ‘물건을 집었을 때 설레는가’라는 질문은 ‘지금’ 자기 삶의 가치와 무게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는 질문이나 다름없다. 정리는 그 자체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묻는 일이라는 얘기다. 마리에를 포함한 수많은 정리 전문가들 역시 집 안에 현재만을 남기라고, 집안을 돌보고 정리하는 건 오늘의 나를 돌보는 행위라고 입을 모은다.

살림의 사전적 정의를 다시 살펴봤다. ‘한 집안을 이루어 살아가는 일’. 살림을 관리한다는 건 그 자체로 삶을 유지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행위를 뜻했다. 살림은 비교 대상도 아니고 한없이 번거로운 일도 아닌 각자가 지금을 살아가는 방식일 뿐이라는 것이다.

살림을 능숙하게 관리하고 집안일을 효율적으로 컨트롤하고 싶은 욕심도 들여다보면 오늘의 나, 오늘의 우리를 위한 일이었다. 단정한 침실, 좋아하는 식기에 놓인 따뜻한 한 끼는 그 자체로 하루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 사소한 정성이 쌓여 만들어지는 평범한 일상은 내일을 살아낼 수 있는 가장 큰 힘이다. 그 단순한 진리가 결혼하고 나서야 선명히 와닿는다. 이렇게 어른이 되나 보다.


박상은 산업1부 기자 pse021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