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근의 공식’ 암기 안 해도 되는 나라

입력 2025-09-05 00:32

독일 연구기관에서 일하는 학부모 A씨는 어느 날 교사로부터 면담 요청을 받았다.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찾은 학교에서 그는 교사에게 예상치 못한 질문을 들었다. “학생이 낸 수학 시험 답안지에는 풀이 과정이 두 줄밖에 없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열 줄 이상 적어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A씨는 며칠 전 아이에게 한 말을 떠올렸다. “근의 공식은 외우면 문제 풀기가 쉬우니까, 그냥 외워서 쓰면 돼.” A씨는 자신이 한국 교육과정에서 배운 대로 아이에게 문제를 ‘쉽게 푸는’ 방법을 알려줬다. 그런데 교사는 그것이 ‘틀린’ 교육이라고 했다. “우리는 학생들에게 문제를 푸는 요령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왜 이런 답이 도출됐는지 그 과정을 배우게 하고 싶습니다. 가정에서 공식을 외우라는 교육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독일의 교육 철학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출장차 찾은 오스트리아와 독일, 룩셈부르크에서 만난 연구자들은 한국과 사뭇 다른 유럽의 교육 방식을 전해줬다. 우선 유럽의 교육은 정답을 빨리 찾아야 하는 한국의 교육 방식과 정반대라고 했다. 한국은 학생들에게 정답을 빠르게 도출하는 방식을 훈련하는 반면 유럽은 과정을 중시하는 교육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학생에게 공부를 시킬지, 기술을 배우게 할지 일찌감치 결정하는 제도도 자리를 잡았다. 독일에서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줄곧 학생을 봐 온 담임교사가 4학년을 마치는 때 학생의 진로를 결정한다. 대학에 갈지, 직업학교에 갈지를 결정해 통보하는 식이다. 대학 진학이 일생일대의 목표인 한국 학부모들은 자신의 자녀가 직업학교에 가야 한다는 결정을 대부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한다. 학교를 1년 더 다닌 후에야 비로소 대학 진학이라는 결과를 받아내는 경우도 있다.

독일의 교육 방식이 정답은 아닐 테다. 다만 유럽이 이뤄 온 기초과학의 성과를 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면이 있다. 길고 지난한 연구를 바탕으로 하는 기초과학은 유럽에서 꽃을 피웠다. 독일은 미국에 이어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국가로 꼽힌다. 뢴트겐, 막스 플랑크, 아인슈타인 등 저명한 과학자들이 독일 출신이다. 독일의 4대 연구협회로 꼽히는 막스 플랑크, 프라운호퍼, 라이프니츠, 율리히 연구소는 과학자들의 요람 역할을 하고 있다.

다시 근의 공식을 생각해본다. 문과 출신인 나조차도 근의 공식을 외운 기억은 어렴풋이 난다. 하지만 근의 공식이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한 공식이었는지, 언제 써야 하는 공식이었는지는 까맣게 잊었다. 수학에 흥미를 잃고 문과행을 택한 것도 근의 공식을 외울 언저리였을 것이다. 숫자와 기호로 가득한 문제를 읽고 푸는 것엔 당최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왜 이런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부터가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수학과 담을 쌓고선 ‘난 어쩔 수 없는 문과생’이라고 되뇌었다.

만약 근의 공식을 외우지 말라는 교육을 받았으면 어땠을까. 문제를 읽고, 어떻게 풀어나갈지 고민하고, 답으로 향하는 여러 갈래의 풀이 방식을 써봤더라면 수학에 조금 더 흥미를 가질 수 있었을까. 국어 시험의 지문을 읽는 게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처럼 수학 문제를 풀 때 재미를 느낄 수 있었을까. 경험해 보지 못한 과거에 여러 가능성이 따라붙지만 아마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근의 공식 같은 정답을 좇다가 학업도, 진로도, 삶도 공식대로만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어쩐지 아득해진다. 공식을 외우지 않아도 되는 나라에서의 삶은 조금 달랐을까 실없는 상상을 해볼 뿐이다.

심희정 산업1부 기자 simci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