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는 1953년 1월 프랑스 파리 초연 당시 큰 논란을 불러왔다. 플롯을 중시하는 전통 연극과 달리 극 중 인물 고고와 디디가 고도를 기다리는 것 외에 아무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부 관객은 지루하다며 야유를 보냈지만 오히려 그 논란은 작품에 대한 높은 관심으로 이어졌다. 언론과 평단은 이 작품이 희망 없는 기다림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담았다며 찬사를 보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프랑스 초연 이후 1955년 영국 런던 무대를 거쳐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부조리극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자리잡으며 20세기 연극사의 중요한 이정표가 됐다. 우리나라에서는 1961년 소규모 실험적 연극을 선보이던 현대극회가 처음 선보였으나 3일간 짧게 공연한 탓에 연극계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잊혔다.
이 작품이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알려진 것은 1969년 12월 연출가 임영웅이 아내 오증자 서울여대 불문과 교수가 번역한 대본을 가지고 올리면서다. 공연 개막을 앞두고 원작자 베케트가 노벨문학상을 받으면서 임영웅 연출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연일 매진을 기록했고 연장 공연까지 이어졌다.
이 공연의 성공은 1970년 극단 산울림 창단으로 이어졌다. 창단 공연 역시 ‘고도를 기다리며’였다. 이후 극단 산울림의 대표 레퍼토리가 된 이 작품은 1985년 홍익대 인근에 설립한 산울림 소극장 개관 공연을 비롯해 5주년, 10주년 등 주요 기념일마다 꾸준히 무대에 올려졌다. 한국 연극계 대부인 임영웅의 대표작으로 자리 잡으면서 다른 극단은 이 작품을 공연하지 않는 분위기가 암묵적으로 형성됐다.
2019년 임영웅 연출 ‘고도를 기다리며’ 50주년을 맞아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올라간 뒤 극단 산울림은 공연을 중단했다. 임영웅의 건강 악화로 더 이상 공연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임영웅은 “앞으로 새로운 고도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지난해 5월 세상을 떠났다.
극단 산울림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50년간 약 1500회 공연을 통해 관객 22만명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후 2023년 8월 대학로에서 새로운 ‘고도를 기다리며’가 열흘간 무대에 올라갔다. 고려대 극예술연구회 출신으로 연극계에서 활동하는 연출가 김기하, 배우 주진모 등이 힘을 합친 프로덕션이다. 당시 잠잠했던 관객 반응은 같은 해 12월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파크컴퍼니의 또 다른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폭발했다. 오경택이 연출을 맡고 원로 배우 신구와 박근형을 앞세운 공연은 50회 모두 매진을 기록하며 신드롬을 일으켰다. 이후 지난 8월 초까지 약 600일간 서울을 포함한 28개 도시에서 전국 투어공연이 이어졌고 139회 공연, 관객 10만 명이라는 역사를 새로 썼다.
올해 산울림 소극장 개관 40주년을 맞아 극단 산울림이 오는 10일부터 10월 4일까지 ‘고도를 기다리며’를 올린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소극장 산울림 무대에 오르는 것은 7년 만이다. 극단 산울림과 오랜 인연을 맺어온 연출가 심재찬이 임영웅의 연출 노트를 토대로 작품을 연출할 예정이다. 임영웅이 생전에 작업했던 무대 박동우, 조명 김종호, 의상 최원, 분장 김유선 등도 함께한다. 배우 이호성 박상종 정나진 등 ‘고도를 기다리며’에 여러 차례 출연했던 배우들과 함께 문성복 문다원이 새롭게 캐스팅됐다.
한편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오마주한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가 오는 16일부터 11월 16일까지 대학로 예스24스테이지 3관에서 공연된다. 미국 배우 겸 극작가 데이브 핸슨이 2013년 뉴욕국제프린지페스티벌에서 첫선을 보인 작품으로, 분장실을 배경으로 두 언더스터디(대역 배우)가 무대에 설 기회를 기다리는 이야기를 그렸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고도를 기다리며’ 열풍을 일으킨 파크 컴퍼니가 오경택 연출가와 다시 한번 손잡고 선보인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오마주하거나 패러디한 작품들 가운데 전 세계에서 가장 자주 공연된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9월 초연을 올렸다가 배우 이순재의 건강 악화로 한 달 만에 조기에 막을 내렸다. 올해 재연에는 ‘고도를 기다리며’에 출연했던 박근형을 비롯해 TV 드라마로 친숙한 배우 김병철과 이상윤, 그룹 샤이니 출신의 최민호가 캐스팅됐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