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이 노인을 돌보는 시대
고령층이 서로의 삶 지지할
‘적극적 노화’ 구조 갖춰가야
고령층이 서로의 삶 지지할
‘적극적 노화’ 구조 갖춰가야
부고가 왔다. 50대 지인의 본인상이다. 반년 전까지도 건강하던 사람이 뜻밖의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은 변함이 없고 권력과 돈과 성공에 대한 욕망, 온갖 고민과 집착으로 가득한 것 같지만, 어쨌거나 오늘도 다양한 이유로 수많은 이들이 세상과 작별한다. 누구도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내일도 오늘처럼 흘러가리라는 믿음 위에 살아간다. 예측할 수 있는 하루는 마음의 안정을 준다. 그러나 그 항상성은 얼마나 단단할까. 갑작스러운 사고, 예상 못한 질병, 가까운 사람과의 뜻밖의 이별은 그 믿음을 쉽게 깨뜨린다. 그래서 오래된 지혜는 늘 경고한다. 평범한 일상 아래에는 불안과 허무, 유한성과 죽음이 흐르고 있다고. 그런 불확실성과 마주하는 훈련이야말로 더 현명하게 살아가기 위한 첫걸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안정을 원하기에 위기를 상상한다. 결핍을 떠올려야 충만함이 뚜렷해진다. 이것이 인간의 탁월한 능력이다. 직접 겪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지금 이 능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한국의 청소년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고,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다. 2024년 기준 인구 10만 명당 11.7명에 달한다. 삶을 살아볼 시간도 없이 무대에서 퇴장한다. 이들의 삶은 일정표와 성적표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 여백도 없고, 선택지도 없다. 주체가 되기도 전에 경쟁에 내몰린다. 상상력이 마를 수밖에 없다. 열린 미래에 대한 기대와 떨림은 더 이상 이들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청소년만의 문제가 아니다. 부모 세대 또한 자녀의 미래를 불안해하며 자신의 노후 준비를 뒤로 미루고 있다. 교육, 결혼, 주거 지원까지 떠안으면서 정작 자신의 삶은 비워진다. 하지만 이 구조는 누구도 구해주지 못한다. 청년은 주체로 성장할 기회를 잃고, 부모는 준비되지 않은 노후로 진입한다. 결국 한 세대의 위기가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다시 그 책임이 원래 세대로 되돌아오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노년은 또 다른 층위에서 위기를 맞고 있다. 한국의 노인 빈곤율은 OECD 국가 평균의 세 배다. 2024년 현재 66세 이상 연련층의 상대적 빈곤율을 39.7%, 65세 이상 노인 자살률도 인구 10만 명당 40.4명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기대수명은 늘었지만 그것이 곧 삶의 질 향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초고령사회 도래는 단지 인구 구조의 변화가 아니다. 60, 70대가 자신의 노후 준비도 부족한 채 배우자나 더 늙은 부모 세대의 돌봄과 생계를 함께 떠맡고 있다. ‘노인이 노인을 돌보는 시대’다.
이쯤 되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이 기대한 항상성은 어디로 갔는가. 은퇴 이후 삶은 가벼워질 거라는 낙관은 왜 이렇게 멀어졌는가. 결국 필요한 것은 새로운 상상이다. 지금의 부담을 줄이면서도 의미를 놓치지 않는 늙어감에 대한 상상. 초고령사회에 맞는 인식 전환과 구조적 개편이다.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고 생산적으로 오래 사는 것이 사회적 과제가 되었다. 이를 위해 제시된 개념이 ‘적극적 노화(active aging)’다. 노인을 수동적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능동적 사회 구성원으로 보고, 그 경험·지혜·역량을 사회에 환원하도록 유도하는 데 초점이 있다. 단순한 건강 관리가 아니라 사회 참여와 지속적인 배움을 포함한다. 은퇴 후에도 지역사회에서 역할을 갖게 하는 방식이다. 유럽 여러 국가는 고령층의 사회 참여를 장려하기 위해 다양한 봉사·멘토링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일본은 ‘돌봄의 공동체화’를 모색하고 있다.
우리도 다시 방향을 잡아야 한다. 개인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대신 고령층이 서로의 삶을 지지할 수 있는 구조를 설계할 때다. 인식과 제도, 상상력이 함께 바뀌어야 한다. 더 지혜롭고 의미 있는 늙어감을 위해서다. ‘당연한 내일’은 없다. 일상의 안정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위기를 상상하고, 그 위에 다시 의미를 세우는 일. 그것이 우리 시대의 ‘항상성’을 다시 정의하는 길일지 모른다.
허영란
울산대 교수
역사문화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