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집은 서울 강남에 모여 있다고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K푸드’의 원형을 보여주는 공간은 종로다. 종로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맛집 1번지다. 조선 시대부터 정치·경제의 중심지였던 종로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를 거치면서 한국의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인문학자 14명이 모여 쓴 ‘종로 미각’은 종로를 넘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음식을 선별해 심층적으로 살펴보는 한편 옛 서울의 문화와 생활사까지 함께 담았다.
설렁탕은 서민 대중의 대표적 음식이다. 소의 고기 부위만 넣어 끓인 투명한 곰탕과 달리 소의 윗다리뼈(사골)가 중심이 돼서 뽀얀 국물이 특징이다. 설렁탕의 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유력한 것은 조선시대 선농제(先農祭)다. 풍년을 기원하는 선농제를 마치고 임금이 시범적으로 농사를 짓던 친경지(親耕地)에서 난 쌀과 기장으로 밥을 짓고, 밭을 갈던 소를 잡아서 국을 끓여 내놓은 것이 ‘선농탕’이었다. 몽골에서 고기를 맹물에 넣고 푹 끓여 먹는 ‘슐렝’에서 유래해 ‘술렁탕’을 거쳐 ‘설렁탕’이 됐다는 설도 있고, 국물이 하얗고 진하다고 설농탕(雪濃湯)이라 했다는 얘기도 있다. 설렁탕은 누가 뭐래도 서울 음식이다. 1929년 9월에 발행된 잡지 ‘별건곤’ 23호에 실린 기사는 팔도 별미로 평양의 냉면, 대구의 탕반, 진천의 메밀묵 등과 함께 “시골 사람이 처음으로 서울에 와서” 먹는 음식으로 설렁탕을 꼽았다.
해장국에 선지를 넣은 선지해장국은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음식이다. 일본은 군수 물자 조달 차원에서 한우를 대규모로 수탈했다. 1910년 연 2만3000마리 수준에서 40년대 초반에는 연 10만 마리까지 늘었다. 일본인들이 소의 살코기만 먹은 탓에 나머지 부산물이 다량으로 발생하자 이를 활용한 음식점이 하나둘 생겨났다. 이 과정에서 애초 조선 시대 백정 등 천민의 식재료였던 선지가 가미된 선지해장국이 등장했다. 또한 일본인 거주지였던 명동과 충무로와 달리 종로 일대에는 하층민들이 주로 살았다.
선지해장국집이 주로 종로 일대에 자리를 잡은 이유를 알 수 있다. 종로의 선지해장국은 나무 시장에 드나들던 나무꾼들과 통금이 있던 시절 ‘고고장’에 출퇴근하는 청춘들과 함께 대중의 음식이 된다.
족발 하면 장충동이다. 고종 황제가 을미사변으로 순국한 호국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1900년에 설치한 장충단(奬忠壇)에 기원을 둔 지명이다. 강제 합병 이후 일제는 장충단을 없애고 수천 그루의 벚꽃을 심고, 장충단 자리에 초대 총독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각을 만들었다. 그 일대는 공원으로 변신한다. 전차 개통과 함께 고급 주택가로 꾸며진 장충동에 모여 살던 일본인들은 일본의 패망으로 허겁지겁 일본으로 도망쳤다. 6·25전쟁 후 그 자리에 모여든 이북의 실향민들은 황해도 토속음식 갱엿돼지족조림을 팔기 시작했다. 장충동 족발이 탄생한 순간이다. 이후 63년에 장충체육관이 지어지고, 10년 뒤 73년에 국립극장이 건립되면서 수많은 인파와 함께 장충동 족발은 번성했다.
이밖에도 조선 시대 고급 약재로 출발해 부유층만 즐길 수 있는 고급 요리를 거쳐 대중 음식으로 진화한 ‘삼계탕’, 궁중 요리에서 시작돼 기름떡볶이와 즉석떡볶이 등으로 변신한 ‘떡볶이’, 중국에 기원을 두지만 한국에 들어와 변형돼 중국으로 역수출된 ‘약과’, 후식에 불과했다가 돼지고기와 나물을 만나 당당히 하나의 음식으로 자리 잡은 ‘빈대떡’, 왕실과 귀족의 음식에서 미군의 밀가루 원조로 대중의 음식이 된 ‘만두’ 등 다양한 음식들의 숨은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저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종로 미각’은 “종로의 음식 맛만큼이나 인문 맛에 빠져볼 수 있는” 책이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