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패배가 고맙다
내게 패배가 없었다면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패배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패배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한때는 패배했기 때문에
분노의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싶었으나
분노도 가을바람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무조건 항복하지는 않았다
인생의 패배자는 없다는 말도
믿지 않았다
내게 패배가 없었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패배했기 때문에 당신은
나를 사랑할 수 있었다
-정호승 시집 '편의점에서 잠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