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진보의 정의

입력 2025-09-05 00:34

“당신은 좌파입니까?” 최근 한 방송에서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이 받은 질문이다. 그는 곧바로 반문했다. 질문이 성립하려면 먼저 정의가 분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좌파냐, 우파냐, 진보냐, 보수냐를 묻기 전에 구체적 사안과 정책별로 물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컨대 기후위기 대응을 당장 해야 한다고 믿으면 좌파, 나중으로 미뤄도 된다고 생각하면 우파라고 설명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은 좌파에 가깝다고 답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보수정당들이 오히려 환경 보존에 더 적극적이다. 그들은 ‘녹색 보수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연보호에 대한 책임과 유산을 계승하려 한다. 결국 환경문제 하나만 놓고도 진보·보수를 단순히 구분하기 어렵다. 문 전 재판관의 말처럼 무엇보다 먼저 정확한 개념 정의가 필요하다.

한국 개신교회는 전통적 가치 수호라는 측면에서 대체로 보수적이다. 특히 가족 가치를 강조하며 동성혼에 강하게 반대한다. 문 전 재판관 역시 청문회에서 “동성애는 문제없지만 동성혼은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이렇게 사안별로 보수와 진보가 엇갈리기에 단일한 잣대로 구분하기 어렵다.

필자 역시 기독교인으로서 “보수냐, 진보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러나 답은 간단치 않다. 영성훈련과 예배에 관한 사안이라면 보수일 것이고, 사회 참여 이슈라면 진보일 수 있다. 질문이 단순한 이분법에 갇힐수록 우리는 오히려 “진보와 보수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더욱 치열하게 물어야 한다.

1990년대 미국 유학 시절, 나는 ‘WWJD’(What Would Jesus Do?·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약어가 미국 기독교계를 휩쓴 현상을 목격했다. 팔찌와 티셔츠에 새겨진 이 문구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본받겠다는 신앙적 다짐이었다. 특히 10대 청소년들에게 더욱 폭넓게 퍼졌다. 의외의 현상이었다. 그 이유를 나는 어느 청년에게서 찾았다. 그는 예배에는 자주 빠졌지만 사회봉사에는 늘 앞장섰다. WWJD는 개인의 신앙 성찰을 넘어 사회적 책임과 실천을 촉구하는 신앙적 언어였다. 예수의 변혁적 행위는 사회적 약자 및 소외된 이들과 연대하는 구체적 삶 속에서 살아 있었다.

그렇다면 예수의 사역은 보수일까, 진보일까. 홀로 기도하며 내적 성찰에 잠긴 예수는 보수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안식일의 전통을 깨뜨리고 병자를 고친 예수는 진보적 모습에 가깝다. 하지만 어느 하나만이 예수의 전부라 할 수는 없다. 그것이야말로 난센스다.

철학자 김상봉 교수는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논하면서 ‘영성 없는 진보정치’를 비판한 바 있다. 그는 한국의 진보를 “전체를 위한 자기희생”으로 정의했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연대의식, 곧 영성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때 영성이란 나와 이 세상이 결코 분리된 타자가 아니라 하나로 이어진 존재라는 믿음이다. 실제로 1970년대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종교적 영성의 기반 없이는 설명할 수 없다. 당시 다른 나라 진보운동이 세속주의에 기대어 있었다면 한국의 진보는 ‘한국형 WWJD’라는 영성의 토대 위에서 민주혁명의 불씨를 키워냈다.

오늘 우리 사회는 다시금 묻고 있다. 진보와 보수의 차이란 무엇인가. 그 답은 이념적 딱지가 아니라 영성을 품은 자기희생과 사회적 연대 안에서만 찾아질 것이다. 정기국회 개원식에서 복장까지도 극한 대립을 몸소 보여주는, 소위 진보와 보수 정치인들을 보는 일은 씁쓸하기만 하다. 정치권이든, 종교계든, 이제는 ‘영성 있는 진보’가 참으로 그리운 때다.

권수영 연세대 인공감성지능 융합연구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