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깨어 있는 시민의 사회

입력 2025-09-04 00:38

5년 전 할리우드 여배우 엘렌 페이지가 자신이 성전환을 했고 이름도 엘리엇 페이지로 바꿨다고 알렸을 때 독일의 여러 매체는 “엘렌 페이지가 엘리엇 페이지로 바뀌었다!”고 보도했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실 그대로의 제목이다. 하지만 ‘죽은 이름’을 공개했다는 이유로 트랜스젠더 활동가들이 격분하자 각 매체가 “이전 버전 기사는 적절치 못했다”며 수정했다고 한다.

독일 시사지 슈피겔의 르네 피스터 기자가 2022년에 펴낸 ‘잘못된 단어: 정치적 올바름은 어떻게 우리를 침묵시키는가’에 나오는 사례다. 책에 등장하는 사례들은 하나같이 한심하고 어처구니가 없다. 저명한 정치학자인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 교수가 어느 날 수업에서 경찰의 흑인 폭행 문제를 다각도로 토론하려 했는데 예상치 못한 벽에 부딪혔다. 일부 학생은 예고 없이 골치 아픈 주제를 던졌다고 항의했다. 또 어떤 학생은 “교수님이 빈곤이나 교육 부족을 언급하면 흑인 차별을 인종주의 이외에 다른 근거로 설명할 수 있다고 착각할 위험이 있다”며 질문 자체를 반대했다.

불편한 질문이고, 토론을 하다 보면 더 불편해질 수 있으니 아예 거부한 것이다. 미국의 일부 대학에선 흑인의 멸칭인 ‘니그로’뿐 아니라 이를 ‘N’으로 축약해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다.

“대다수 사람들이 ‘깨어 있음’(Woke·워크)을 싫어합니다. 오직 진보적 활동가들만 좋아하죠.”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가 한 말이다. 인종차별 반대, 평등, 소수자 보호 등 진보적 이슈에 깨어 있음을 뜻하는 워크와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는 한때 맹위를 떨쳤으나 이제 수세에 몰리고 있다. 다른 의견을 전혀 용납하지 않는 독단과 혐오가 판치다 보니 반감이 커진 것이다.

미국 대학가와 문화예술계 등을 전방위로 단속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 나라는 ‘워크’가 될 수 없다. 워크는 망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은 한 인터뷰에서 조금이라도 오른쪽에 있는 모든 사상에 대해 극도의 불관용을 보이는 극단적 진보주의자들 때문에 미국 대학 캠퍼스가 매우 불쾌한 장소가 됐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지금 평범한 미국인들은 그렇게 과격한 진보운동을 거부하고 있다고 했다.

뉴욕타임스(NYT)가 2016년 트럼프의 첫 대통령 당선에 충격을 받고 영입했던 칼럼니스트 바리 와이스는 4년 뒤 NYT를 떠나면서 “이 신문은 선거에서 배웠어야 할 교훈(다른 미국인의 말에 귀 기울이고 무리의 생각에 저항하기)을 실천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이어 “트럼프가 이 나라와 세계에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고발하는 4000번째 칼럼 게재가 우리 직업을 더 안전하게 하고 클릭 수를 올린다면 굳이 독자에게 도전하는 기사를 낼 이유가 있을까”라고 신문의 편파성을 질타했다. NYT와 CNN 등 미국의 주요 언론은 우파 매체보다 질적으로는 낫지만, 정치적으로 확신에 찬 공동체의 관점을 강화하는 사업 모델은 우파 매체와 다를 게 없다. 그래서 사회의 분열을 막기보다 부추기는 경우가 훨씬 많아 보인다.

분열을 막지 못하면 서로 대화하지 않고 서로를 경멸하는 사회가 된다. 피스터는 “트럼프와 공화당이 훨씬 더 나쁘다는 이유로 일부 좌파의 근본주의를 외면하는 것은 태만”이라며 “민주주의를 위해선 좌파의 변질 역시 날카로운 눈으로 지켜봐야 한다. 독단적 좌파가 극우파의 생명수가 돼버린 미국과 똑같은 길을 독일이 따라가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천지우 국제부장 mog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