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동준 기자의 교회 아재] 예수 담지도 못하면서 그릇만 붙드는 신앙

입력 2025-09-06 03:14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밴드 멤버들이 각자 악기를 들고 합주하고 있는 모습. 챗GPT

바스켓(Basket)은 바구니, 케이스(Case)는 상자. 따로 보면 단순하지만 합치면 전혀 다른 뜻이 된다. ‘바스켓 케이스(Basket Case)’. 원래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사지를 잃은 병사를 비하해 부르던 말이었지만 지금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 흔히 말해 ‘완전히 맛이 간 사람’을 뜻하는 속어로 쓰인다.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망가진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2002년 여름 한일월드컵으로 붉은 물결이 서울 거리를 뒤덮던 해. 고등학생이던 나는 교회 문학의 밤 행사 무대 위에 섰다. 손에 땀이 흥건히 차올랐고 낡은 앰프에서는 잡음이 새어 나왔다. 앞줄에는 교회 친구들이, 무대에는 학교 밴드 멤버들이 긴장된 얼굴로 공연의 시작을 기다렸다.

첫 곡은 그린데이의 ‘바스켓 케이스’. 단순한 코드에 경쾌한 리듬이라 밴드부 학생들이 즐겨 연주한 곡이었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제목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가사 역시 내 알 바 아니었다. 그저 빠른 비트에 맞춰 마음껏 소리를 질렀다.

우리도 양심은 있었기에 다음 곡은 ‘교회 노래’였다. 예수를 알지 못하는 보컬이 샤우팅으로 은혜로운 가사를 뱉어내는 장면을 떠올리면 헛웃음이 난다. 겉으론 번듯했지만 속은 텅 비어 있었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교회 안팎에서 비슷한 논란이 이어진다. 지난달 한 유튜버는 임형규 라이트하우스 서울숲교회 목사를 공개 저격했다. 비판의 이유 가운데 임 목사의 옷차림이 있었다. 마치 ‘날라리’처럼 옷을 입고 설교한다는 이유였다. 임 목사는 최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저를 두고 꾸미는 걸 좋아한다, 옷에만 신경 쓴다며 비난하는 말을 들었다. 정작 복음의 본질은 외면한 채 옷차림에만 매달리는 걸 보며 씁쓸했다”고 전했다. 그는 또 “예수가 비즈니스 정장을 입으신 게 아니지 않나. 의복은 문화인데 비본질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새삼 느꼈다”고 말했다.

지난해 찬양팀 ‘위러브(WELOVE)’와 댄스팀 ‘마피(MAPI)’가 함께 찍은 영상도 비슷한 비난에 시달렸다. 춤추는 청년의 팔뚝 문신 하나가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회심 전 새긴 것이라 해명했지만, 많은 이들에게 여전히 ‘문신=날라리’라는 공식이 작동했다. 청년의 감동적인 회심 이야기가 아닌 문신 자체에만 매몰된 댓글들은 차갑고 냉소적이었다.

내 친구 J의 기억도 겹친다. 청년 시절 그는 가장 비싸고 아끼던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예배에 갔다가 어머니 권사님께 꾸중을 들었다. “교회엔 좋은 옷을 입고 와야지.” 그러나 J에게 그 바지가 바로 ‘좋은 옷’이었다. 그는 “좋은 옷의 기준이 도대체 뭔데”라며 고개를 저었다.

옷차림 같은 비본질적인 문제를 두고 ‘성스럽다·속되다’의 선을 긋는 태도는 오늘 교회에 여전히 남아 있는 성속이원론의 그림자다. 문신은 속되고 정장을 입어야만 성스럽다는 식의 주장은 본질과 상관없는 구분을 절대화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이 바로 그 이분법을 깨고 신앙과 삶을 하나로 묶으려 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지금의 논쟁은 시대착오적이다.

윤영훈 성결대 교수는 이 논란을 설명하며 ‘아디아포라(adiaphora)’라는 개념을 꺼냈다. 성경이 옳다 혹은 그르다로 분명하게 규정하지 않은, 쉽게 말해 ‘회색 지대’라는 뜻이다. 문화와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할 수 있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거다. 윤 교수는 “새로운 시도는 낯설어서 공격받는다”며 “혐오는 흘겨보는 데서 비롯한다”고 말했다. 이어 “섣부른 단정보다 상대를 제대로 바라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예수님도 우리를 그렇게 바라보신다”고 덧붙였다.

아는 건 번거로운 일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안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더 빨리 혐오하고 더 쉽게 배척한다. 그러나 누군가를 안다는 건 본래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예수께선 정죄하기에 앞서 먼저 다가가셨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건네셨고 돌을 든 사람들 앞에서 간음한 여인을 지키셨다. 매국노라 불리던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 함께 식사하셨다. 사람들이 그어놓은 경계를 건너 예수님은 생명을 일으키셨다. 예수를 담지는 못할망정 예수를 담을 그릇에 집착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바스켓 케이스’ 같은 모습이 아닐까.


손동준 기자 sd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