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학 목사의 우보천리] 가만히 들어온 누룩을 경계한다

입력 2025-09-03 03:04

오늘은 한국사회 안에 가만히 스며든 ‘누룩’ 하나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독자들 가운데 1979년 이란혁명을 기억하는 분이 있을 것이다. 당시 루홀라 호메이니는 서구 민주주의와 세속화를 거부하며, 정치를 통해 이슬람의 확장과 세력 강화를 꾀했다. 이때부터 이슬람은 오랜 숙적 이스라엘뿐 아니라 유럽과 미국의 민주주의 국가들을 향해 본격적인 테러를 감행하기 시작했다. 그 정점에 있었던 사건이 바로 2001년 발생한 9·11테러다. 이러한 흐름을 우리는 ‘이슬람 근본주의’라고 부른다.

그러나 근본주의는 이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종교 안에는 근본주의가 존재한다. 가까이는 기독교 안에도 근본주의가 있고, 예수 그리스도 당시에는 바리새주의가 유대교의 근본주의라 할 수 있었다.

근본주의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경전을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한다. 이를 ‘경전문자주의(biblical literalism)’라 한다. 모든 경전에는 역사적 배경과 맥락이 있다. 그러나 이를 무시한 채 한 글자 한 글자를 움직일 수 없는 계시로 받아들이며 그대로 따를 것을 강요한다. 예를 들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 14:34)는 구절은 고린도 교회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이를 무시하고 여성을 교회 리더십에서 배제하는 것은 전형적인 문자주의 해석이다. 이슬람 근본주의도 코란을 이런 방식으로 해석하여 여성과 약자, 외국인을 차별하거나 배제한다. 한국교회 안에도 이런 경전문자주의가 의외로 많이 자리하고 있다.

둘째 이성과 합리성을 부정하며 맹신으로 흐른다. 오래전 다른 교회 다니는 청년이 상담을 위해 찾아온 적이 있다. 한번은 교회 청년대학부에 미국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가 쓴 ‘노인과 바다’ 소설을 들고 교회 모임에 간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청년부 목사님이 그 소설을 손에 들고 있는 자신을 보더니 “헤밍웨이는 무신론자이고 나중에 자살한 사람인데요”라고 말하더란다. 그 눈빛이 이런 무신론자의 글, 그것도 스스로 목숨 줄을 놓아버린 불경한 사람이 쓴 소설을 왜 읽느냐고 정죄하는 눈빛이었단다. 교회를 다니고 신앙을 가지면 무신론자가 쓴 일반 소설은 읽으면 안 되는 것인지, 자살한 사람의 책은 불경한 것이니 가까이하면 안 되는 것인지 너무 혼란스럽다고 상담을 한 것이다. 필자는 이런 식의 판단은 우리 주변에서 반복해서 재현된다고 본다. 필자는 이런 태도가 이성과 합리성을 부정하는 근본주의적 현상이라 본다. 만약 그 목회자를 만난다면 이렇게 묻고 싶다. “그렇다면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도 감상하면 안 되는 것입니까.” 고흐 역시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니, 그의 그림을 걸어두는 것조차 불경한 일이 될까.

이성과 합리성은 본래 좋은 것이다. 초대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도 “신앙은 이성을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성을 완성한다”고 말했다. 기독교는 문명과 문화를 불편해하지 않는다. 그것 또한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허락하신 선물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선용하느냐 악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신앙에 대해 일체 언급하지 않는 일반 영화일지라도, 거기서 신앙의 보편적 가치인 사랑 자비 용서 화해의 가치를 가져올 수 있으면 이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근본주의는 이를 무조건 거부한다.

그 결과 신앙은 점점 편협해지고 세상과 신앙은 분리된다. 결국 신앙은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역설적으로 선교에 걸림돌이 된다. 잘 믿으려는 열심이 오히려 믿음의 장애물이 되는 기이한 현상이다.

이상학 새문안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