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음식·화장품·관광·언어
1억 K팝 팬들 삶에 스며들어
1880년대 파리·1920년대 뉴욕
지금 서울 그 시절 떠올리게 해
화려함에 취하지 말고
지속 가능하도록 지원해야
1억 K팝 팬들 삶에 스며들어
1880년대 파리·1920년대 뉴욕
지금 서울 그 시절 떠올리게 해
화려함에 취하지 말고
지속 가능하도록 지원해야
나에게는 일본인 친구가 있다. 2022년 가을, 한 K팝 시상식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된 우리는 방탄소년단(BTS) 팬덤 ‘아미(ARMY)’라는 이름으로 금세 친해졌고,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녀는 BTS를 시작으로 세븐틴, 데이식스까지 관심을 넓히며 해마다 서너 차례 한국을 찾는다. 콘서트를 보고, 관광지와 맛집을 찾아다니고, 화장품 쇼핑과 뷰티 시술까지 즐긴다. 한국어 공부도 열심이라 이제는 번역기 없이도 제법 유창하다. 그녀의 여정은 단순한 ‘팬 활동’을 넘어, 한국 문화가 국경을 건너 누군가의 삶에 스며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개인적 체험은 최근 넷플릭스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의 흥행으로 이제는 세계적 현상으로 확장됐다. 영화 OST는 미국과 영국 차트를 동시에 석권했고, 작품은 넷플릭스 사상 최다 시청 기록을 세웠다. 영화 속 배경인 서울 남산타워와 성곽길 등을 무대로 한 ‘케데헌 투어’(약 76만원)는 연말까지 예약이 꽉 찼다. 전통문화 캐릭터에 관심을 가진 외국인들이 몰리며 국립중앙박물관 굿즈 판매 역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제 K팝은 단순한 음악 장르가 아니다. 음식·화장품·관광·언어를 아우르는 21세기형 문화 권력이다. 전 세계 K팝 팬은 이미 1억명을 넘어섰고, 올해 산업 매출은 2조원을 훌쩍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여기에 K푸드와 K뷰티까지 더하면 규모는 폭발적으로 커진다. 해외에서 판매되는 라면·과자 포장지에 한국어가 당당히 새겨지고, 외국 젊은이들은 한국어 가사가 들어간 노래를 오히려 ‘힙하다’고 느낀다. 정작 한국인인 우리가 체감하지 못하는 사이, 한국은 이미 ‘가장 와보고 싶은 나라’ ‘가장 따라 하고 싶은 나라’가 됐다.
서양 근대문화사에서 가장 화려했던 시절을 꼽으라면 흔히 1880년대 파리와 1920년대 뉴욕이 거론된다. 파리의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는 만국박람회와 에펠탑, 몽마르트르 언덕의 살롱과 카페가 예술가와 대중을 하나로 묶은 시대였다. 모네, 르누아르, 세잔, 고흐가 활동하던 시절이다. 1920년대 뉴욕은 재즈와 브로드웨이를 중심으로 대중문화 산업을 세계적 규모로 키워냈다. 스콧 피츠제럴드와 헤밍웨이, 루이 암스트롱이 그 무대에 있었다. 한 방송에서 유현준 교수가 말했듯 지금 서울은 그 시절 파리와 뉴욕을 떠올리게 한다. 홍대와 성수동, 이태원의 클럽, 부산국제영화제 거리에는 세계 젊은이들이 모여든다. BTS, 봉준호 감독, 한강 작가, ‘오징어게임’, ‘어쩌면 해피엔딩’까지. 한국의 창의성은 지금, 세계인의 시선을 끌며 가장 역동적으로 꿈틀대고 있다.
그러나 화려함에 취해 있을 수만은 없다. 성공의 과실을 우리가 온전히 거두지 못하고, 문화적 인프라도 충분치 않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지식재산권(IP) 문제가 대표적이다. 오징어게임은 세계적 성공을 거뒀지만 IP 수익은 대부분 넷플릭스로 돌아갔다. 우리가 만든, 혹은 K팝을 소재로 한 콘텐츠가 세계를 열광시켜도 정작 수익 구조에서 소외된다면 산업의 지속 가능성은 위협받는다. 지식재산권 주권을 확보하는 일은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다. 동시에 K콘텐츠가 세계 시장에서 안정적으로 유통·소비되고, 지속적 수익을 낼 수 있는 글로벌 플랫폼을 자체적으로 갖추는 것도 절실하다.
문화산업은 창작자의 상상력에서 시작되지만, 그 상상력이 흐를 수 있는 길을 만드는 건 사회 전체의 몫이다. 일본이 만화·애니메이션을 위해 공정계약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프랑스가 신인 창작자에게 문화기금을 지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국 역시 음악·영상·게임·패션·뷰티를 아우르는 인재들이 마음껏 실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서울에 집중된 K컬처 무대를 그 외 지역으로 넓히는 일, 대형 기획사 중심의 구조 속에 인디·중소 기획사가 숨 쉴 공간을 확보하는 일도 함께 고민할 때다. 무엇보다 K팝이 세계를 들썩이는 시대에 5만명 이상 수용할 대형 전용 공연장이 사실상 없다는 현실은 씁쓸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술가들이 창의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다. 정부는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 원칙을 지켜야 하고, 민간은 단기 이익보다 생태계 전체의 지속 가능성을 바라봐야 한다. 화려한 무대 뒤, 토대를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한국 문화의 내일이 달려 있다.
한승주 논설위원 sj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