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응급실을 찾는다. 구급차를 타고 바쁘게 달린다. 죽음을 제대로 바라볼 새도 없이 급하게 죽는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잠을 자다가 죽었으면 좋겠어”라는 슬픈 기대를 품는다. 죽어가는 과정을 겪지 않고 그냥 바쁘게 죽었으면 하는 바람인 것이다. 바쁜 죽음은 많은 이들의 희망이지만 아쉬운 죽음일 수도 있다. 임종 과정은 두려움 외에도 많은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죽음의 순간은 인생을 마치는 과정이지만 인생을 이해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급한 죽음은 이런 이해를 방해한다.
만약 죽음이 예측 가능한 경우라면, 임종은 갑자기 들이닥친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의례가 되어야 한다. 호스피스 교육을 받을 때 임종 순간을 담은 다큐를 시청한 적이 있다. 죽음을 많이 봐왔던 나도 롱테이크 장면의 임종 영상은 오래 보고 있기 힘들었다. 화면 속에 갇힌 죽음조차 무서운 죽음이었고 한 사람의 죽음이 모든 인간의 죽음으로 보였다. 인상 깊었던 것은 환자의 딸이 가쁜 숨을 내쉬는 환자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바짝 대고 속삭이는 장면이었다. 힘든 일을 같이해 나가는 사람들처럼, 출산을 돕는 산파처럼 환자의 고통을 같이 느끼고 말 그대로 죽음의 순간을 함께하고 있었다. 그 장면이 분만 과정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환자는 힘을 주듯 신음하고 옆에 있는 사람은 조금만 참으라고, 이제 곧 끝날 거라고 울면서 위로했기 때문이다.
물론 출생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반대편 극단에 있지만. 출생과 죽음, 하나는 그 사람의 울음으로 시작하고 하나는 다른 사람의 울음으로 끝난다. 태어나며 시작된 울음이 평생의 시간을 돌아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며 소멸하는 게 인생인 것처럼, 한때 아이였던 사람이 누워 있다. 죽음은 힘든 일이다. 죽어가는 사람도 지켜보는 사람도 두려움과 슬픔과 공감을 쏟아내며 탈진한다.
임종 시 마지막 말은 그 사람의 죽음 곁에 꼭 붙어서 오랫동안 기억된다. 그 말이 한 사람의 인생이 남기는 말인지 알 수 없고 신음 사이로 희미하게 흘러나오지만, 가족들은 죽어가는 사람의 숨에서 말을 찾는다.
죽어가는 사람이 죽지 않기를 바라며 동시에 그 사람의 죽음을 기다린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지금 그 사람이 내뱉는 호흡이 마지막이 아니길 바라며 언젠가 올 마지막 호흡을 기다린다. 하지만 기다리던 다음 호흡이 돌아오지 않는 순간이 있다. 지나가 버린 숨이 마지막인 걸 뒤늦게 알아차리는 시간, 그리고 오지 않는 마지막 숨을 간절히 기다리는 시간. 죽어가는 이의 숨을 세는 시간, 임종의 순간이다. 죽은 사람이 더 이상 말도 없고 숨도 없을 때 가족들은 울음을 터트린다. 울음으로 시작된 한 사람의 삶에 대해 다른 사람이 울음으로 대답하며 애도는 의례처럼 어느 순간 하나의 형식을 만든다. 애도는 환자의 숨 하나하나에, 그 숨을 세는 시선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다. 애도의 시간을 위해 임종은 오롯이 환자와 가족들을 위한 장소에서 이뤄져야 한다.
병원에 임종실이 갖춰졌다. 일정 규모 병원은 의무적으로 임종실을 설치·운영해야 한다. 정부가 나서서 공간을 확보한다니 반가운 일이다. 임종실 운영은 단순히 장소만 제공하는 게 아니다. 죽음을 맞이할 시간 또한 보장한다는 의미다. 제대로 된 장소가 아니면 바쁘게 죽음을 치러야 한다. 정부가 시민의 삶뿐 아니라 죽음에도 관심을 가진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죽음이라는 개인적인 일에 대한 공적인 배려다. 하지만 정책의 시도만큼 현실성도 중요하다. 정부에서 내놓은 임종실 이용 조건은 현장의 입장에서는 아직 까다롭다. 임종에 대해서는 돌봄의 문턱이 조금 더 낮아져도 좋을 것이다. 관대함은 정책 실행에도 필요한 미덕이다.
김대현
창원파티마병원
흉부외과 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