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지난달 20일 국민일보 인터뷰에서 북한군의 우크라이나 전쟁 참전을 거론하며 “아시아 군대가 유럽 본토에서 전쟁을 벌인 것은 아마 칭기즈칸 이후 처음일 것”이라고 말했다.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군대는 더 강해진다는 우려였다. 북한이 우크라이나에서 얻은 실전 감각은 곧 군사력의 단단한 근육이 된다. 북핵도 이미 한계선을 넘어섰다. 미 의회조사국은 북한이 생산한 핵분열물질로 핵탄두를 최대 90개 만들 수 있다고 내다봤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중국 전승절 참석을 앞두고 미사일 생산 공장도 방문했다. ‘우리는 핵탄두 미사일을 마음껏 찍어낼 수 있다’는 과시였다.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들에게 북핵 해법을 물어보면 늘 비슷한 세 가지 답변이 돌아온다. “북핵을 인정할 수는 없다. 한국의 자체 핵 개발은 불가능하다. 결국 한국은 미국의 확장억제를 믿어야 한다” 하지만 ‘이미 존재하고 진화하는 북핵’을 어떻게 할 것인지 물으면 누구도 속 시원한 답변을 하지 못한다. ‘전략적 인내’를 내세운 조 바이든 행정부, 김정은과의 톱다운 회담을 강조한 도널드 트럼프 1기 행정부 모두 북핵 해결에서는 무능했다. 그 사이 북한은 사실상 ‘핵보유국’처럼 행동하고, 전쟁 참여로 실전 능력까지 키우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피스메이커’라고 평가했다. 자신은 그 옆에서 ‘페이스메이커’가 되겠다고 했다. 트럼프가 김정은과 인간적 친분이 있고 여러 차례 대화 의사를 밝힌 만큼, 그가 한반도 평화 문제를 이끌도록 옆에서 지원하겠다는 뜻이었다. 한반도 문제를 주도하겠다고 했지만 핵 문제에서는 별 성과가 없었던 문재인정부의 ‘운전자론’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접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관건은 트럼프의 ‘피스메이킹’ 능력이다. 트럼프는 자신이 6~7개의 국제 분쟁을 중재한 피스메이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트럼프가 2기 취임 직후부터 개입한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는 요란한 중재 노력에도 아직 포화 속에 있다. 트럼프의 피스메이킹은 푸틴의 진격을 막지 못했고,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폭격을 멈추지 못했다. 미국의 이란 핵 시설 폭격도 스펙터클한 장면을 연출했지만, 이란 핵 능력이 꺾였는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트럼프에게 평화를 만들려는 의지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가 실제 평화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는지는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
북핵 문제는 가자지구나 우크라이나 전쟁만큼이나 뿌리 깊은 난제다. 게다가 트럼프가 한반도 비핵화를 진정으로 추진할 의지가 있는지조차 불분명하다. 그는 2기 들어 북한을 향해 ‘핵보유국’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트럼프가 김정은과의 회담을 언급할 때마다 노벨평화상을 받기 위한 ‘스펙쌓기’ 아니냐는 의심이 따라붙는다. 북한은 비핵화 논의 자체를 거부한다. 북한은 이 대통령이 방미 기간 한·미가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협력하겠다고 하자 “아직도 헛된 기대를 점쳐보는 것은 너무도 허망한 망상”이라고 비난했다.
마라톤에서 페이스메이커는 단순한 응원단이 아니다. 치어리더가 선수의 열정을 자극한다면 페이스메이커는 선수의 호흡과 리듬을 지켜낸다. 이 대통령이 말한 페이스메이커 역시 그런 의미일 것이다. 트럼프가 오버페이스로 김정은과 덜컥 위험한 합의를 맺지 않도록, 한반도 비핵화를 향한 긴 코스를 이탈하지 않도록 옆에서 호흡을 맞추는 역할이 돼야 한다. 지금 코스 한쪽에는 ‘불가역적인 핵보유국 지위’를 위해 폭주하는 김정은이, 다른 쪽에는 노벨상을 향해 질주하는 트럼프가 있다. 그사이에서 이 대통령의 힘겨운 페이스메이킹이 이제 막 출발선에 선 셈이다.
임성수 워싱턴 특파원 joyl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