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상대 약점 꼬집는 현실
그 어색함 무마하는 유행어
상처 보듬는 긍정적 사고 절실
그 어색함 무마하는 유행어
상처 보듬는 긍정적 사고 절실
최근 인터넷 커뮤니티나 일상의 대화에서 가볍게 상황을 표현하는 단어 중 ‘긁힌다’라는 말이 빈번하게 쓰인다. 이 표현이 언제 어떤 계기로 시작했는지 정확하지 않다. 모든 유행어는 명확한 출발점을 알 수 없는 법이니까. ‘긁힌다’라는 말은 상대의 약점을 자극하거나 상대의 진지한 조언을 가벼운 농담으로 취급하고 싶을 때, 혹은 상대가 어떤 상황을 정색하고 받아들이거나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때 주로 쓰인다. “너 긁혔구나?”라며 상대를 놀리거나 상황을 가볍게 만드는 환기용 수사법인 셈이다.
유행어처럼 이 말이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떠돈다는 것, 그만큼 자주 사용된다는 건 일련의 사회현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원래부터 있었던 통상적 표현을 새로운 신조어처럼 포장해 사용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유독 ‘긁힌다’라는 표현이 자주 쓰이는 이유의 이면엔 오늘의 한국사회에 만연한 불편한 현실의 반영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서로를 배려하지 못하고 질러버리는 현실, 자신의 약점이나 허물이 상대와 비교해 더 분명하게 도드라지는 걸 참지 못하는 현실이 우리가 긁힌다고 말하는 현상의 한 부분이 아닌가 싶다.
여하튼 일종의 사회현상으로 자리잡은 ‘긁히는’ 현실엔 자신만의 고유한 상황과 심리를 보호하고 싶거나 관계를 맺는 데 있어 더는 조언이나 진지한 가르침을 거부하는 현상인 것도 발견하게 된다. 우리 모두 어느 정도 취약한 부분을 안고 살아간다. 그것이 자극될 때, 특정한 말이나 상황 또는 자신의 가치관이나 정체성이 자극될 때 일어나는 저항심리를 품게 된다. 신기한 것은 어떤 말은 객관적으로 보면 상당한 비난이나 부정적 판단인데, 본인에게 그 말은 큰 상처가 되지 않는다. 반대로 객관적으로 그냥 흘려보내도 대수롭지 않은 말인데, 유독 본인에게만 그 말이 큰 상처로 와 닿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이는 상처에 관한 보호본능의 역작용일 수 있으며, 더 근본적으로는 자기존중에 관한 역반응이란 짐작도 아예 배제할 수 없다. 상대로부터 공격받지 않을 권리에 관한 항변은 상대의 진지한 돌아봄이나 조언을 무시하고픈 ‘묻지 마’ 심리가 깊어졌다는 슬픈 반증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자기존중의 가치와 더불어 상대가 보존하고 싶은 가치나 신념, 평정을 이루는 상태를 부러 헤집고, 그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싶은 심리 또한 ‘긁히는’ 심리적 기저에 강하게 작동되는 건 분명 문제다. 나와 관계 맺은 사람이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이 공격에 불편해야만 자기 세계가 보호받는다는 심리, 이른바 동조화의 심리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식의 동조화 과정은 서로의 솔직한 일면을 보고 나누고 싶다는 연대의식보다는 상대의 감정과 마음을 할퀴고 괴롭게 한 뒤 그렇게 헝클어진 뒤에 찾아오는 허탈함과 박탈감을 부채질하는 체념의 악의가 더 크게 자리잡는 게 아닌지 우려스럽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예전보다 더 긁히는 일과 자주 마주하고 있는 듯하다. 직장, 학교, 공동체에서의 이해관계 충돌이 예전에 비해 더 빈번해진 것이다. 타인과 비교할 일은 많아지고, 상대적으로 약점이라 여길 법한 일이 훨씬 더 도드라지게 된 오늘의 현실이다. 그럴수록, 충돌하는 상황이 더 많아질수록 자기보호의 본능과 조롱의 표현으로만 처리할 게 아니라 내가 힘들고 어려운 약점을 가졌다는 사실을 타인에게 보여주고 이해를 구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타인의 약점을 파고들어 그 약점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관전하는 것만큼 결국, 그 긁히는 약점이 자신에게 부메랑이 돼 돌아오는 악순환은 쉽게 근절되지 않을 것이니까. 그러면 더 아프고 서글플 뿐이니까.
숨죽여 살아가기만 해도 상처 주고, 상처 입기 쉬운 세상살이다. 내가 긁히는 것만큼 너도 쉽게 긁힐 수 있다는 공감대를 조롱의 가면을 벗고 수용하는 일, 타인의 상처를 곪아 터트리는 게 아닌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긍정적인 섬세함이 절실해지는 요즘이다.
주원규 소설가·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