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지노박 (8) 천사와 악마 두 얼굴의 삶… 파멸 향한 끝없는 질주

입력 2025-09-03 03:04
선글라스를 쓴 지노박이 1981년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 거리에 세워진 미국인 인형 옆에서 포즈를 잡고 있다. 지노박 제공

화려한 무대와 박수 속에서도 공허함을 감추지 못하던 시절이 이어졌다. 20대 초반에 접어든 나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연주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내가 공연차 한국에 머무는 사이 가족들이 텍사스 휴스턴으로 이주했다. 그렇게 가게 된 낯선 도시 휴스턴은 내 인생에 가장 치명적인 경험을 안겼다. 바로 마약과의 첫 만남이다.

그 시절 만난 K형은 늘 자신감이 넘쳤고, 나를 친동생처럼 챙겨주었다. 부모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마음을 그 형에게는 숨김없이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점점 그를 의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갱단과 어울리며 마약에 깊이 발을 들인 사람이었다. 어느 날 클럽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그는 은밀히 작은 봉지를 내밀며 내게 말했다. “이거 아주 좋은 거야. 힘 날 거야.” 나는 그를 믿었다. 그 순간, 무심코 건네받은 코카인이 내 인생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꿔놓으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첫 마약의 경험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충격이었다. 마약을 처음 경험했던 그날 밤,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다시 그 기분을 느끼고 싶은 갈망과 뭔가 잘못된 길에 들어섰다는 불안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러나 이미 한 번 열린 문은 다시 닫히지 않았다.

코카인에서 시작된 마약은 크랙, 헤로인, LSD로 이어졌다. 특히 싸구려지만 강력한 중독성을 가진 크랙은 내 삶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몇 분 간격으로 다시 찾아오는 갈망 때문에 밥도 굶고 밤낮없이 그것만 찾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 정도쯤이야’ 하고 숨길 수 있었지만 점점 내 영혼은 불안과 공허에 갉아 먹혔다. 화려했던 무대와 음악은 여전히 내 삶의 한 축이었지만 그 뒤편에서는 마약과 폭력이 내 일상이 되어버렸다.

총을 들고 다니며 위험한 순간도 수없이 넘겼다. 피 흘리는 친구를 부축해 편의점 뒤에서 밤새 지혈하던 기억, 시내 모텔에 숨어 며칠을 벌벌 떨던 기억, 빗길 고속도로에서 차가 세 바퀴나 구른 사고까지….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 한 번 겪기도 힘든 죽음의 고비를 나는 마치 일상처럼 겪었다. 그때마다 ‘이번에는 끝이구나’ 싶었는데, 이상하게도 살아남았다. 그리고 또다시 마약에 몸을 내맡겼다.

내 안엔 정반대의 또 다른 내가 있었다. 무대 위에서 청중에게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는 ‘천사 같은 뮤지션’의 모습 말이다. 사람들은 나를 사랑했고 청춘들은 내 연주를 동경했다. 하지만 무대에서 내려오면 곧바로 마약에 취해 무너져가는 ‘악마 같은 방황자’로 돌아갔다. 그 사이 간극이 커질수록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나를 아껴주던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넌 참 이상한 사람이야. 미워하고 멀리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는 사람.” 그 말은 내 삶의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는 말이었다. 마약과 음악, 천사와 악마. 그렇게 나는 두 얼굴을 가진 채 파멸을 향한 길 위에 서 있었다.

정리=김수연 기자 pro111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