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끝 몰린 10대들… 상처 내며 무너진다

입력 2025-09-01 18:54

수진(15·이하 가명)이가 자해를 시작한 건 초등학교 6학년 겨울이었다. 처음엔 고무줄을 이용했다. 손목에 감고 세게 당기자 터질 듯한 통증 탓인지 답답한 마음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고통에 익숙해지자 고무줄만으로 부족했다. 결국 주변에 있던 날카로운 도구를 손에 쥐는 날이 늘었다. 그는 1일 “통증에 집중하면 현실의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며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비참한 감정에 사로잡혀 자해가 반복됐다”고 말했다.

자해를 시작한 배경에는 학업 스트레스와 따돌림이 있었다. 친구들은 “자퇴하라”고 조롱했다. 부모님에게 괴로운 마음을 털어놨지만 공부를 잘해서 극복하라는 답을 받았다. 수진이는 버티기 위해 자해를 출구로 삼았다고 털어놨다.

10대 청소년들이 ‘비자살적 자해’라는 정신건강 위기에 빠지는 사례가 늘고 있다. 비자살적 자해는 명확히 죽으려는 의도 없이 고의적으로 신체를 훼손하는 행위를 뜻한다. 사회적 관심이 높은 자살에 비해 일부 청소년의 일탈로만 치부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정도가 심해지면 결국 자살 고위험군으로 발전하게 된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이 온몸으로 발신하는 ‘소리 없는 SOS(구조 신호)’에 예민하게 귀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국민일보는 SNS에 자해 사진을 수차례 올린 10대 청소년 5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극도의 스트레스와 외로움, 누적된 무력감을 해소하기 위해 자해를 택했다고 답했다. 고교 2학년 지연이는 부모의 부재로 인한 결핍이 관심에 대한 갈증으로 이어진 경우다. 지연이는 “죽고 싶어서가 아니라 살고 싶어서”라고 자해 이유를 밝혔다.

중3 형식이는 학원 스트레스에 무딘 칼로 자신의 손목에 상처를 내는 자해를 시작했다. 2~3일에 한 번 자해를 하고, 약을 바르는 일상이 이어진다. 상처는 반창고로 감춘다. 중2 나연이는 외모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수면유도제를 과다복용하는 자해를 하고 빈 약통을 SNS에 올린다. 나연이는 배가 부풀고 고통을 느끼면 스트레스를 잠시 잊을 수 있다고 털어놨다.

고3 수험생 준호는 “자해할 때만큼은 안 좋은 생각이 덜 나는 것 같다. 죽고 싶은 마음도 사라진다”고 말했다. 준호는 우울증을 주변에 호소했지만 “우울증은 병이 아니다”는 답을 들은 뒤에는 토할 때까지 음식을 먹는 폭식으로 괴로움을 잊는다고 했다.

이들 청소년의 공통된 반응은 주변에 자해를 털어놔도 도움을 받을 곳이 없었다는 것이다. 상처를 보여주면 다른 이들이 걱정해주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돌아온 건 “징그럽다”는 말과 선생님의 꾸중뿐이었다. 상담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학교 상담교사에게 자해 경험을 털어놓은 뒤 주변에 소문이 퍼지면서 더 숨게 됐다. 병원 치료는 비용이 너무 비싸 마땅히 상담할 곳이 없었다. 이 때문에 SNS 등 또래가 모이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만 마음을 털어놓는 굴레가 반복되고 있다.

청소년들의 자해는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학업 스트레스, 가족 내 갈등, 학교폭력, 아동기 학대나 방임까지 복합적인 요인이 결합돼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지난 1월부터 친구와 함께 자해를 시작했다는 중학생 윤정이는 "지난해 봄부터 친구 없이 혼자 다녔고, 우울한 감정을 홀로 이겨내기 어려웠다"며 "따돌림당해 전학 온 친구와 서로의 사정을 공감하다가 동반 자해를 해본 게 시작이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자해가 단순한 훈계나 행동을 제지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박종익 강원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비자살적 자해 청소년들의 공통된 특징은 사회적 관계 형성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며 "친구나 가족의 지지를 받지 못할 때 긴장을 해소할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해 자해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자살 위험을 낮추는 가장 중요한 보호 요인으로 사회적 네트워크를 꼽았다. 친구·교사·가족 등 아이들이 스스로 털어놓고 공감할 수 있는 관계망을 만들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에 따르면 비자살적 자해 증상은 1년에 5일 이상 자해를 시도하는 반복성이 특징이다. 자해의 원인을 두고 의료계에 확립된 단일 이론은 없지만 극도의 스트레스를 스스로에게 표출하는 감정조절 행동이라는 시각이 대체적이다. 상처를 내 공격성을 분출함으로써 일시적인 안정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일부 연구는 이러한 안정효과가 길어야 1시간 남짓에 불과해 자해가 반복된다고 지적한다.

문제는 이런 병리적 증상을 본인이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서울대병원 연구에 따르면 자해를 경험한 청소년은 우울증(82.6%), 불안장애(43.0%), 외상후 스트레스장애(17.4%) 등 정신 병리적 문제를 함께 앓고 있었다.

전문가들은 정신질환 진단과 의료적 개입이 반드시 뒤따라야 하며, 단순히 행동만 제지할 게 아니라 근본적인 스트레스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재원 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정신과 교수는 "자해가 반복되면 자살 위험이 높아질 수 있다"며 "자살의 전 단계로 볼 수 있는 만큼 국가가 개입해 예방·치료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아이들은 스트레스 상황에서 도움을 받을 곳이 없다고 생각하기 쉬워 병원에 오길 꺼려한다"며 "국가가 아이들을 병원과 연계해주기만 해도 의사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찬희 조민아 기자 becom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