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더더기 다 뺀 전기 픽업… 미 스타트업 ‘트렌드 역행’

입력 2025-09-02 00:52

전 세계 완성차업체들은 격화하는 전기차 경쟁에서 주도권 확보를 위해 미래 기술력을 총동원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 미국 전기차 스타트업이 대형 디스플레이, 내장 오디오, 심지어 전동식 창문조차 없는 전기 픽업트럭을 개발 중이다. 대신 가격을 확 낮췄다. 한국자동차연구원은 보고서를 내고 “트렌드에 역행하는 이 기업이 시사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일 자동차업계에 따르면 ‘슬레이트 오토’는 내년 출시를 목표로 전기 픽업트럭 ‘슬레이트’를 개발하고 있다. 고전압 배터리와 운전자보조시스템(ADAS)을 제외하고 대부분 첨단 기능을 뺐다. 차체에 도장도 하지 않는다. 공정도 단순화했다. 이를 통해 가격을 2만 달러 중반대로 맞출 계획이다. 한 완성차업계 관계자는 “경기 침체 등으로 차량 구매에 부담을 느끼는 소비자에게 자동차의 본질에 충실하면서 저렴한 선택지를 제공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2022년 회사 설립 이후 아마존 창립자 제프 베이조스 등 유력 펀드사가 이 회사에 투자했다. 슬레이트는 SK온의 52.7㎾h 배터리를 장착한다. 미국 환경보호청(EPA) 기준 최대 주행거리는 241㎞다. 군더더기라고 판단한 기능을 대폭 줄이는 대신 부족한 부분은 고객 맞춤형으로 제공한다. 원하는 소비자는 비용을 내고 색상을 입히거나 부품을 추가하는 식이다. 슬레이트 오토는 이를 통해 추가 수익을 낼 수 있고 고객의 충성도를 높일 수 있다고 판단한다. 차량 공개 2주 만에 구매 예약 건수가 10만건을 넘었다. 실용성과 가성비를 중요시하는 평범한 미국인, 생애 첫차 구매자, 전기차에 관심은 있지만 복잡성을 두려워하는 노년층 등이 주요 고객층이다. 크리스 바먼 슬레이트 오토 최고경영자(CEO)는 “복잡한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은 오히려 가격 상승과 잦은 고장의 원인”이라고 꼬집었다.

다만 미국 정부가 전기차에 제공하던 세액공제 혜택을 이달 30일 폐지하기로 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슬레이트 오토는 최근 홈페이지에서 ‘세금 공제 후 2만 달러 미만’이라는 문구를 삭제했다. 슬레이트 오토는 2027년까지 연간 15만대 생산을 목표로 하지만 업계에선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임현진 한자연 책임연구원은 “슬레이트 오토는 소프트웨어보다 하드웨어, 복잡함보다 단순함, 압도적 기능보다 친숙함을 내세우는 등 트렌드에 역행해 돌파구를 마련한 사례”라며 “목표 달성 여부는 다소 불투명하지만 이 기업이 시사하는 실용적 소비, 맞춤형 제조 트렌드 등은 주목할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