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쇠’(miser)와 ‘고통’(misery)은 철자 하나 차이다. 그리스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구두쇠는 언제나 가난하다(The miser is always poor).”
죽으면 다 놓고 갈 것들인데 중국의 진시황이나 이집트의 왕들처럼 재물 보화를 함께 관에 묻지도 못할 터인데 왜 물질에 욕심을 낼까. 남들보다 더 큰 집, 더 큰 차를 갖고 더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음식을 즐기기 위해서, 은퇴 후 풍요로운 노년을 위해서, 유독 자식 사랑이 남다른 한국인이다 보니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등이 재물에 집착하는 이유일 수 있겠다.
탐욕은 끝이 없다. ‘돈은 행복 순이 아니다’는 것은 유명 학자들의 논문이나 여러 조사 결과를 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진리다. 동그라미 개수만 달라질 뿐 100평 고급맨션에 사는 부자가 느끼는 감정이나 단칸방에 살아가는 평범한 가장이 느끼는 감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지 돈이나 성적, 명예에 좌우되지 않는다.
행복은 물질과 비례하지 않아
1974년 미국의 경제학자 리처드 이스털린은 ‘경제 성장이 인간의 운명을 개선시키는가’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전 세계에서 행복도와 국민총생산(GNP)을 조사한 뒤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소득이 일정 수준에 달하고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면 추가적인 소득 증대가 행복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른바 이스털린 패러독스다.
세계적인 케인스 전문가인 로버트 스키델스키와 철학자인 그의 아들 에드워드 스키델스가 공저한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에서 돈벌이 자체는 인간의 진정한 목적이 될 수 없다고 역설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좋은 삶이 돼야 함을 강조한다. 행복한 삶이란 즐거운 심리적 상태나 욕망이 단순히 충족된 삶이 아니라 인간이 추구하는 선이나 ‘좋음’들이 구현되는 삶이라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잃었다’라고 하지 말고 ‘돌아갔다’고 말하라고 가르친다. 재물을 빼앗겼을 때 원래 자리로 돌아간 것으로 생각하라는 교훈이다. 무엇을 갖고 있더라도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우리는 모두 청지기이다. 하나님이 맡겨놓으신 재물을 잠시 보관하는 것일 뿐이다.
행복은 물질적 요인이 아닌 사회적 요인에 크게 좌우된다는 것을 행복경제학자뿐 아니라 고대의 철학자들이 제시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경제학자 스테파노 바르톨리나와 프란체스코 사라치노가 27개국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실제 국민소득 증가와 함께 인생 만족도가 증가하는 현상은 단기간(2년 정도)에만 나타나고 이후에는 사람들이 소득 증가분에 익숙해졌다. 더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경제성장이 행복에 끼치는 영향은 완전히 소멸한다.
이와 반대로 어떤 집단에 대한 소속감이 강해지거나 그 밖에 여러 형태로 사회적 유대감이 강화되면 단기적으로는 만족감이 조금 증가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크게 증가한다. 사회적 유대 효과는 누적되고 지속한다. 사회적 유대는 경제위기가 초래한 고통을 크게 완화할 수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2차 세계대전 등 힘든 시기를 함께 겪은 국민들의 유대관계는 참혹한 시기의 경제적 시련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 이러한 조사를 바탕으로 조너선 라우시는 저서 ‘인생은 왜 50부터 반등하는가, 브루킹스연구소 수석연구원이 찾아낸 행복의 조건’에서 진정한 부는 ‘물질적 부’가 아니라 ‘사회적 부’라고 했다.
탐욕의 치료제인 예수를 더 갈망해야
많이 소유한다고 해서 많이 베푸는 것은 아닌 듯하다. 성경은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설명하고 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4)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좋은 것에는 두 가지 범주가 있다고 했다. 돈 같은 좋은 것들은 나눌수록 줄어든다. 돈이나 재물이나 지위가 그렇다. 아퀴나스는 이런 것을 ‘세상적인’ 혹은 ‘일시적인’ 좋은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다른 좋은 것이 있다. 이 좋은 것은 남에게 나눌수록 더 불어난다. 기쁨을 나누면 자신의 기쁨이 줄어들까 봐 혼자 간직하려는 ‘기쁨 구두쇠’는 없다.
기쁨은 나눌수록 오히려 커진다. 내가 좋아하는 책이나 영화나 노래를 이야기해 줘서 상대방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내 기쁨도 배가 된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나눈다고 해서 줄어드는 선(善)은 작은 선밖에 없다.”(‘어둠 속의 방황; 서사와 고통의 문제’, 엘레오노어 스텀프) 더 좋은 선, 즉 영적 선을 나누는 것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이런 것은 나눌수록 불어난다. 이를 지키는 유일한 길은 나누는 것이다.
CS 루이스와 릭 워런 목사처럼 수입의 대부분, 심지어 90%까지 교회나 빈민 구제, 또는 다른 하나님 나라의 일에 드리는 이들도 많다. 미국 테네시주 내슈빌 그리스도장로교회 담임목사를 지낸 스캇 솔즈 목사는 ‘선에 갇힌 인간, 선 밖의 예수’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다르게 돈을 쌓아 두고 자신만을 위해 소비하는 이 유행병 앞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더욱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탐욕의 치료제이신 그리스도를 더욱 갈망해야 한다”고 말했다.
성경 속 재물
그렇다면 재물을 대하는 크리스천의 자세는 ‘돌 같이’ 여겨야 할까. 주식투자도, 코인투자도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재테크를 무시해야 하나. 먹고 살기 충분한 재물과 사치의 적당한 경계는 어디쯤일까.
하비 콕스 미국 하버드대 신학대학원 교수는 저서 ‘예수 하버드에 오다’에서 “기독교 역사에서 재물은 논쟁거리가 됐다”고 했다. 초대교회 때는 돈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오자 교인 중 부유하지 못한 사람들과 어느 정도 나눠 가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이것이 교회 안의 적대감의 원인이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사도 바울의 노력이 그의 편지에서 엿보인다.
4세기 로마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합법화된 뒤 그리스도인 중 많은 사람이 기성 교회의 부유함에 분노를 느끼고 집단으로 빠져나가 사막에 있는 움막이나 동굴에서 살았는데 이를 ‘수도원 운동’이라 불렸다. 중세시대 많은 개혁자들은 교회의 세상적 풍요를 개탄했다. 마르틴 루터도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팔아 엄청난 재물을 축적하는 것을 비판했다.
콕스 교수는 재물 논쟁에 대한 답을 브라질의 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에게서 찾았다고 했다. 그는 ‘자발적 가난’과 ‘비자발적 가난’으로 구분했다. 성 프란치스코가 택한 자발적 가난은 풍요로운 영적 보상을 가져다주지만 비자발적 가난은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을 짓누르고 질식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자발적 가난은 축복이지만 비자발적 가난은 사람이 만든 저주라고 했다.
성경은 물질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물질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고 올바르게 사용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도록 가르친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 6:38)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 6:19~20)
다만 성경은 돈에 대한 사랑을 경계하고 재물을 우상화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돈을 우선시하는 맘몬주의를 경계하는 말이다. 맘몬은 예수가 쓰던 말인 아람어로, 재산이나 소유를 나타내는 말의 그리스어 형태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 플러스’에서 프랭크 루박은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다른 우상이 들어오면 하나님은 떠난다”고 했다. 성경에는 물질에 대한 욕망으로 파멸한 이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간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을 정복한 후 전리품을 개인적으로 취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금과 은, 아름다운 외투를 훔쳤다. 그의 탐욕은 이스라엘 군대의 패배와 그의 가족 전체가 돌에 맞아 죽는 비극적 결과를 초래했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가룟 유다는 은 30에 예수를 팔아넘겼다.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스승을 배신하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명희 논설위원·종교전문기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