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억강부약과 경제성장 사이

입력 2025-09-02 00:32 수정 2025-09-02 00:32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이 주먹을 불끈 쥐며 환하게 웃고 있다. 지난달 24일 노동조합법 2·3조 개정안(노란봉투법)이 국회 벽을 넘는 순간이다. 양 위원장과 민주노총 관계자들은 본회의장 방청석에 앉아 법안 표결 과정을 지켜봤다. 마치 노동계가 보낸 ‘대선 청구서’가 제대로 결제되는지 지켜보러 온 감독관처럼.

같은 날에 찍힌 다른 사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 주요 그룹 총수들이 그리 환하지 않은 표정으로 공항에 들어서고 있다. 한·미 정상회담 지원을 위한 경제사절단이 미국으로 향하는 장면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에 앞서 방미길에 동행할 총수들을 불러 “지금의 위기를 기회로 만들자”며 ‘원팀’을 강조했다. 다만 이 대통령은 “우리도 이제 선진국 수준에 맞춰야 한다”면서 ‘노란봉투법을 거둬 달라’는 재계 요청을 뿌리쳤다. 노란봉투법은 결국 총수들의 출국 몇 시간 전 국회를 통과했다.

더불어민주당은 그 이튿날 이 대통령과 경제사절단이 방미 일정을 소화하던 때에 ‘더 센 상법’으로 불리는 2차 상법 개정안마저 본회의에서 의결했다. 기업 이사들의 충실의무 대상을 전체 주주로까지 확대하는 1차 상법 개정안 통과 50여일 만에 자산 2조원 이상 상장사의 집중투표제 도입 의무화, 감사위원 분리 선출 확대까지 법제화한 것이다.

재계는 “우려를 넘어 참담하다”며 법안 저지에 매달렸지만 결과를 바꾸지도 시행을 미루지도 못했다. ‘실용적 시장주의’의 친(親)기업 성향을 내세우는 정권에서 재계가 반(反)기업적이라고 반발하는 입법이 연이어 강행되는 현실. 기업들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정권의 ‘진의’는 무엇인지.

정부 출범 이후의 일관된 흐름을 보면 집권 초기 정책 방향은 노동권과 소액주주 권리 강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대주주에 대한 회사 안팎의 견제·통제 강화, 총수의 지배력 축소도 꾀하는 것 같다.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지만 ‘재벌개혁’의 일환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말이 ‘억강부약(抑强扶弱)으로 대동세상(大同世上)’이다. 이 대통령이 취임사에서도 강조한 핵심 국정 철학으로, 강자를 누르고 약자를 도와 모두 함께 잘사는 세상을 향해 가야 한다는 뜻이다. 억강부약이 소년공 출신으로 ‘바닥까지 내려가 박차고 오르기의 연속’이었던 삶에서 체화된 이 대통령의 신념이라면, 실용적 시장주의는 집권을 위해 택한 전략적 기조라고 해야 할까.

문제는 억강부약과 시장주의, 이 둘 사이에 분명 상충되는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기업 중심의 성장을 외치면서 기업 활동을 옥죄는 조치들이 쏟아지는 모순은 여기에서 발생한다고 본다. 기업들은 특히 ‘왜 하필 이 시점이냐’고 묻는다. 물론 정치적 논리로는 새 정부 출범 초기 가장 힘이 셀 때가 적기라고 봤을 수 있다. 그러나 기업으로서는 미국발 관세 충격과 수출·내수 동반 악화 등 복합 위기에 대응하기도 버거운 차에 경영 불확실성과 노사 관계 리스크를 키우는 입법 펀치까지 날아드는 상황을 맞게 됐다. 엎친 데 덮친 격이다.

또 하나. 약자를 위한다며 추진한 정책들이 되레 약자를 힘들게 하고 약자들의 원성을 사는 오발탄이 된 사례는 과거 정부에서도 빈번했다. 문재인정부 때의 소득주도성장과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임대차 3법만 봐도 그렇다. 경제 상황과 정책 파장을 정밀하게 진단하지 않고 성급히 칼을 댄 결과였다. 지금의 연이은 입법 공세로 기업 경영이 위축되고 투자와 채용이 줄게 된다면 그 피해는 결국 어디를 향하겠나. 재계의 우려를 기우나 엄살로만 치부할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 대통령은 “검든 희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 아닌가”라며 경제 회복과 성장을 위해 탈이념적 실용주의로 가겠다는 입장을 종종 밝혀왔다. 그렇다면 우선 고양이가 쥐를 잡으러 다닐 수 있게 목줄부터 놔줘야 하지 않을까.

지호일 산업1부장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