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동 칼럼] 고교학점제의 민낯

입력 2025-09-02 00:50

준비 없는 시행, 현장은 혼란
교사 등 인프라 빈곤 드러내

사교육으로 떠밀리는 학생
다양성 존중 취지는 좋지만
실행력은 의문

미국 모델 본뜬 제도
한국식 정착이 절대 과제
연착륙 위한 세밀한 지원 절실

미국 하이틴 영화를 보면 학생들이 쉬는 시간마다 각자 원하는 수업을 들으러 분주히 오가는 장면이 나온다. 교실 입구에는 몇 학년 몇 반이라고 쓰인 표찰 대신 수업하는 교사의 이름과 과목명이 적혀있다. 미국 고교생은 자신의 관심사와 진로에 맞는 과목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학교는 교과목의 난이도에 따라 폭넓은 수준의 세부 과목을 제공하고, 학생들의 학업능력에 따라 교과목을 수강할 수 있게 한다. 학생 개개인이 진로와 적성에 따라 교과를 선택하고 이수하는 학점제 운영이 핵심이다.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기본적인 교육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 영어, 수학에 대해서는 국가 수준의 핵심 성취 기준을 마련한다. 필수 과목의 최소 학점을 지정하고, 이 외의 학점은 학생들이 선택하여 이수하도록 하는 것이다.

선택의 폭은 넓고도 깊다. 대표적인 것은 AP(Advanced Placement)프로그램이다. 이 제도는 고등학교에서 대학 수준의 과목을 미리 이수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고교생 신분으로 대학 1학년 수준의 과목을 배우고, AP 시험을 통해 대학 입학 시 학점 인정이나 입학 우대 혜택을 받을 수 있다. IB(International Baccalaureate) 프로그램도 있다. 이 프로그램은 학생의 자기 주도적 학습과 비판적 사고를 강조하며, 탐구 기반 수업과 논·서술형 평가를 특징으로 한다. 많은 대학에서 입시 전형으로 활용되는 프로그램이다. DE(Dual Enrollment) 제도도 눈여겨볼 만하다. 고교생이 고등학교와 지역 대학에 동시에 등록하여 대학 수업을 수강하고 학점을 취득하는 제도인데, 고등학교와 대학 학점을 동시에 인정받을 수 있다. 이처럼 미국의 고등학교 커리큘럼은 학생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과목 선택권을 보장하는 게 특징이다. 학생들에게 자신이 듣고 싶은 수업을 스스로 정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자유를 준다. 스스로 시간표를 짜서 수업을 듣고 남는 시간에는 각자 알아서 학교 곳곳에서 공부하거나 토론하는 것이 미국 고교 현장이다.

이런 제도를 본떠 만든 것이 우리의 고교학점제다. 미국처럼 학생들이 자신의 진로와 적성에 따라 과목을 선택하고, 이수 기준에 도달한 과목에 대해 학점을 취득·누적해 졸업하는 제도다. 문재인정부가 들어선 2017년 기본 방향 및 도입 일정이 발표됐고, 2018∼2022년 관련 법령과 교육과정 개정 등을 통해 운영 기반이 마련됐다. 이어 윤석열정부가 고교학점제 추진·보완을 국정 과제로 내세우며 시행에 탄력이 붙었고, 시범 사업을 거쳐 올해 고등학교 1학년부터 전면 도입됐다. 8년의 준비 기간 끝에 시행된 셈이다.

하지만 학교 현장은 어수선하다. 학교와 교사는 준비 부족을 호소하고 있고, 학생과 학부모는 불안감에 사교육으로 몰리고 있는 상황이다. 충분한 준비 없이 맞은 학교 현장이 혼란스럽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강경숙 조국혁신당 의원이 전국 17개 시·도 교육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겨울방학 기간(지난해 12월~올해 2월) 고교학점제 설명회를 연 학교는 전체 2261곳 가운데 466곳(20.6%)에 불과했다. 울산(1.8%) 부산(5.6%) 서울(6.1%) 등에선 10%에도 미치지 못했다. 준비가 안 된 학교가 많았다는 얘기다. 여기에 학교당 진로·진학 상담교사가 많지 않아 모든 학생이 만족할 만한 상담을 제공받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이렇다 보니 불안해진 학생과 학부모는 사교육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연간 수백만원에 달하는 고교학점제 컨설팅 학원까지 등장할 정도다. 교사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문제는 내년부터다. 고교학점제 교육과정은 1학년 때 공통 과목을 이수하고 2학년부터 선택 과목을 듣도록 설계돼 있다. 내년이면 학생마다 수업 시간표가 달라지는 것이다. 학교 현장에서는 공통 과목만으로도 버거운데 선택 과목 이수가 본격화되면 감당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교육 당국은 “세밀한 준비가 절실하다”는 현장의 아우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고교학점제가 학교 현장에 안착하기 위해서는 교육 인프라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가 우선돼야 한다. 무엇보다 학생들의 선택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다양한 과목이 개설돼야 한다. 교원 역량 강화, 진로 상담 교사 대폭 확보 등도 필수적이다. 고교학점제가 연착륙할 수 있는 길이다. 사교육이 아닌 공교육이 사는 길이기도 하다.

김준동 논설위원 jd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