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 이 세상에 필요하다고 생각해?”라는 동생의 질문에 주저 없이 “응”이라고 답한다. 이유를 묻자 “그림을 그리고 돈도 벌고 해야 하니까”라는 답이 돌아온다. 커다란 캔버스 앞에 붓을 든 영락없는 화가의 모습으로 너무나 현실적인 답을 내놓는 누나에게 동생은 오히려 놀란다. 진짜냐는 동생의 되물음에 당연하다는 듯 “살아야 할 거 아니야”라고 말하는 그는 다운증후군을 앓는 발달장애인이자 5000장 넘는 인물 캐리커처를 그린 화가, 정은혜 작가다. 그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은 구독자가 29만명을 넘는다. 지난 5월 지적장애가 있는 조영남씨와 아름다운 결혼식을 올렸고, 그 과정과 알콩달콩한 신혼 이야기가 최근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되며 많은 이에게 감동과 울림을 줬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피해 세상과 완전히 차단하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던 시절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일하면서 돈도 벌고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한” 정 작가는 발달장애를 가진 이와 부모가 소망하는 모든 것을 이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 남편과 함께 가족을 떠나 둘만의 보금자리에서 생활하다니. 꿈 같은 단어 ‘자립’이다.
성공스토리를 가능케 한 건 어머니 장차현실 작가와 그림이라는 ‘일’이다. 성인이 되며 시설에 나가지 못하고 사회생활이 단절되자 상태가 급격히 악화했던 딸을 다시 살리기 위해 어머니는 그림을 건넸다.
3년 전 인터뷰를 위해 만났던 장차 작가는 “은혜와 나만의 어두운 동굴에서 나와 사람들을 만나면서 가능성이 찾아졌다”고 떠올렸었다. 당시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출연 이후 처음으로 딸을 향해 따뜻한 시선이 쏟아지던 게 “기적 같으면서도 불안하다”고 했던 어머니의 마음은 이제 조금 더 편안해졌을까. 생활공간을 독립했지만 두 사람 모두 발달장애가 있는 정 작가 부부에겐 계속된 자립 지원이 필요하다. “내가 죽고 세상에 없더라도 두 사람이 살아낼 수 있는 단단한 어떤 것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 장차 작가의 여전한 목표인 이유다.
경기도 포천의 래그랜느 보호작업장과 농사체험장을 운영하는 남기철 대표의 마음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자폐성 장애 아들을 둔 그는 ‘자폐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아이에게 등산이 효과적’이라는 기사를 본 걸 시작으로 매주 토요일 산을 오르고 있다. 산행은 다른 자폐성 장애인을 초대해 함께하는 공동체로 커졌다. 단 하루도 자녀에게서 떨어질 수 없는 부모들에게 쉼을 주자는 아내의 제안이었다. 남 대표와 아내의 마음은 교회를 통해 세상으로 전해졌다. 봉사자들이 계속 모이고 산행은 어느새 30년째가 됐다. 이 모임은 아이들은 물론 그들의 부모도 변화시켰다고 한다. 자신의 세상 속에 있는 아이와 함께 그 세상에 갇히게 되는 부모들에게 ‘혼자가 아님’은 무엇보다 큰 위로였을 것이다. 남 대표와 이 공동체가 꿈꾸는 목표 또한 자립이다. 농사체험장을 꾸린 건 일을 경험하고 배우는 공간을 넘어 앞으로 그들이 살아갈 자립의 터전이 되길 바라서였다. 이 역시 부모들만으로 영원히 유지될 수 없다. 부모 없이도 유지되도록 지원할 사회가 필요한 것이다.
최근 밀알복지재단 스토리텔링 공모전에서 아동·청소년 부문 대상을 받은 박주환군의 글은 자폐 아동을 키우는 부모의 외로운 헌신을 절절히 전했다. 말로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중증 무발화자폐증을 앓는 아들을 포기하지 않고 세상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전하고 숫자 1, 2로 표현할 수 있도록 끌어낸 건 엄마였다. 박군은 국민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엄마에 대해 “내가 외로울 틈 없이 세상을 보여주고, 닫혔다고 생각할 때 문을 만들어 준다. 그 문을 열어보라고 용기를 준다”고 표현했다.
다만 언제까지고 부모가 모든 것을 짊어질 순 없다. “엄마, 이제 나도 할 수 있는 게 생겼으니까 엄마도 하고 싶은 거 좀 하세요.” 15살 발달장애 아이의 이 말에 우리 사회도 답할 때가 됐다.
조민영 미션탐사부장 my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