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기치 않은 순간 찾아온 기억
그 시간 다시 사는 듯한 경험
그곳에서 글쓰기가 시작된다
그 시간 다시 사는 듯한 경험
그곳에서 글쓰기가 시작된다
길을 걷다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길 건너편에서 단발머리 여자애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우리는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파란불이 켜지길 기다렸다. 여름의 태양만큼이나 느리고 고집스러운 신호등이었다. 이마가 뜨거워져 고개를 슬쩍 들어보니 가로수 잎 사이로 햇빛이 쏟아졌다. 마침내 신호가 바뀌고 여자애가 다가왔다. 그 순간, 오래전 어느 여름에 여자애와 내가 함께 걸었던 길이 눈앞에 다시 펼쳐졌다. 잊고 있던 장면들이 하얀빛과 함께 쏟아져 내렸다.
의지와 무관하게 찾아오는 기억이 있다. 어떤 냄새나 빛, 우연히 흘러나온 노래가 불러내는 장면들. 마르셀 프루스트는 이것을 ‘비자발적 기억’이라 불렀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맛본 순간, 어린 시절의 풍경이 순식간에 되살아난 장면이 대표적 사례다. 이 기억은 의식적으로 떠올린 회상과 달리 감각이 열어젖힌 문을 통해 불시에 밀려든다. 과자 한 조각이 어느 시절의 공기와 빛을 현재로 데려온 것처럼 기억은 단순한 잔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현재의 사건이 된다. 바로 그 예기치 못한 순간에 글쓰기는 시작된다.
프루스트는 요양을 위해 머물렀던 카부르에서 여러 차례 비자발적 기억을 경험했다. 그는 호텔방의 거울 하나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부재를 불러내거나 카부르의 감각이 베네치아의 감각과 겹쳐 드는 순간을 기록했다. 훗날 이 장면들은 여러 번의 수정과 변주를 거쳐 그의 소설에 담기게 된다. 우리가 잘 아는 마들렌도 사실은 구운 빵 조각이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기억의 변주가 아닌가. 하지만 기억하자. 이 변주의 기본이 되는 리듬은 ‘진실에 가깝게’라는 것을.
프루스트는 자발적 기억과 비자발적 기억을 엄격히 구분했다. 전자가 지성의 기억이라면 후자는 감각의 기억이다. 자발적 기억은 의식적이기에 선택과 편집이 가능하고, 과거를 진정성 없는 이미지로만 되살리려 하는 경향이 있다. 또 현재의 해석이 덧씌워져 본래의 생생함을 잃기도 한다. 반면 비자발적 기억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도래해 마치 그 시간을 다시 사는 듯한 경험을 선사한다. 과거의 잔상이 아니라 현재의 감각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기억. 작가는 그것을 붙잡고자 글쓰기를 시작한다. 포착된 과거는 감각의 자극을 통해 현재의 것이 되고, 우리는 그것을 단순히 기억하는 게 아니라 현재의 몸과 감각으로 다시 살게 된다. 바로 이것이 프루스트가 글쓰기에서 ‘감각’을 중요하게 여긴 이유다.
그렇다면 과거의 한순간을 되살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흔히 삶을 단편적인 사건들의 집합으로 경험한다. 하지만 되살아난 기억은 흩어진 시간을 새로운 맥락 속에서 현재에 통합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조금 더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다. 이때 기억 문학은 단순한 증언의 차원을 넘어 삶과 존재의 진실을 찾아가는 내면의 통로가 된다. 감각과 사유를 통해 시간을 다시 소유하는 순간, 삶은 덧없이 흘러가 버리는 허무의 늪이 아니라 온전히 내 것인 시간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프루스트에게 문학은 자신의 내면에서 솟아난 감각과 기억에 응답하는 행위였고, 마들렌은 그 응답을 가능하게 한 열쇠였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마들렌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열쇠가 돼 내면으로 향하는 문을 열 수 있다면, 그곳에서 당신만의 글쓰기가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나의 마들렌, 단발머리 여자애는 기억과 세월을 품고 횡단보도를 건너왔다. 더는 여자애라 부를 수 없는 그 애가 내 앞에 섰을 때, 나는 한 여성의 잃어버린 시간이 여름의 빛과 냄새로 되살아나는 경험을 했다. 우리 안에 잠들어 있던 여자아이들이 다시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이야기의 문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이제 그 문을 열면 삶이 온통 여름빛으로 눈부시던 시절, 우리가 품었던 내면의 진실 하나가 나와 단발머리 여자애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신유진
작가·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