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마지막이 될 글을 계속해서 쓴다”

입력 2025-08-29 00:17
“저는 끝까지 쓰는 소설가입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다 쓰지 말라고 해도, 마지막까지 쓸 겁니다.” 생전 김학찬 작가의 말이다. 지난 2월 세상을 떠난 그는 산문집 ‘투암기’와 유고 소설집 ‘구름기’로 우리 곁에 남았다. 소설집 제목 ‘구름기’는 작가가 “구름보다 신기하고 아름다운 것을 모르던 때”를 부르던 말이었다. 교유서가 제공

2025년 2월 8일 토요일 늦은 오후. 교유서가 신정민 대표는 전화 한 통을 받는다. 모르는 번호였다. 전화기 너머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김학찬 작가의 아내인데, 조금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편이 떠나면서 출판사에 돈을 돌려드려야 한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장례 치르고 약속 지키겠습니다.” 돈은 계약금을 말하는 거였다.

2022년 말 나온 소설집 ‘사소한 취향’으로 김 작가와 인연을 맺은 신 대표는 이듬해 집 근처에서 우연히 작가와 만났다. 폐암 4기라는 말을 그때 들었다. 작가는 전에는 고사하던 소설집을 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암 진단을 받고 난 후부터 매일 글을 쓰고 있다고도 했다. 신 대표는 소설집과 산문집을 내자고 제안하고 계약을 했다. 산문집의 제목 ‘투암기’도 작가가 직접 정했다.


하지만 작가는 끝내 원고를 완성하지 못하고 4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계약금은 그에게 남은 유일한 빚이었다. 신 대표는 “부의금으로 생각하고 계약금은 돌려받지 않겠다”고 문자를 남겼다.

장례식을 마친 후 신 대표는 작가의 아내를 설득했다. ‘끝까지 쓰는 작가’로 남길 바랐던 남편의 작품을 모아 원고를 정리해 두 권의 유고집이 나올 수 있었다. 2012년 장편소설 ‘풀빵이 어때서?’로 창비장편소설 대상을 받은 작가는 대학에서도 강의하는 문학연구자이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산문집 ‘투암기’에 손이 먼저 갔다. 그의 마지막이 더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투암기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기침으로 병원을 찾았다가 폐암 진단을 받고 난 뒤 일기처럼 담담하게 써 내려간 글들이다.

1부와 2부로 구성돼 있다. 글을 읽어 가면서 악화하는 병세를 느낄 수 있다. 1부의 글들은 비교적 활기차고 곳곳에 씁쓸하지만 유머가 녹아 있다. 처음 폐암 진단의 전조였던 기침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썼다. “선배들은 식민지 폐병 앓는 소설가 같다며 놀렸다. 나는 얼굴은 잘생긴 이상이기를 바랐지만 현실은 김유정이라고 투덜거렸다.” 갖고 있던 책들을 온라인 중고서점을 통해 정리하면서도 아무 책이나 골라 중고 책 가격으로 승부를 겨루는 게임을 생각하기도 한다. 생에 대한 미련도 곳곳에 배어있다. 그는 “아직 미련하게도 버리지 못한 책은, 삶에 대한 그만큼의 미련”이라고 쓴다.

병세가 급격히 악화한 뒤 쓴 2부는 “아마도, 마지막이 될 글을 계속해서 쓴다”로 시작한다. 글은 짧아지고 소제목도 없다. 그의 거친 호흡이 느껴지는 듯하다.

“쓸 것인가. 말 것인가. 쓴 것까지 남길 것인가. 한 문장이라도 더 쓸 것인가. 이제 나는 그때그때 쓰기로 한다. 내가 의지할 것은 별표(*), 애스터리스크 뿐이다. *를 믿고 조금만 더 쓸 것이다.”

2부의 중간중간은 *를 경계로 이리저리 오가는 단상이 담겨있다. 마지막 문장에서도 작가는 끝까지 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침 일찍 아내와 같이 성북동에 있는 빵집에 갔다. 한 번도 먹어보지 않았던 빵으로 식사를 했다(다음에는 역시 먹던 빵을 사야겠다).”

투암기에는 국어교사인 작가의 아내 최수경이 쓴 ‘의연해야지 하지만 울고 있었다’는 제목의 글이 붙어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흠모했던 작가의 모습이나 여행을 통해 탄생했던 작품들의 비화를 읽을 수 있다.

소설집 ‘구름기’는 미발표작을 포함해 청년 시절에 써놓고 책을 묶지 않았던 작품과 ‘사소한 취향’ 이후 썼던 최근작 10편이 실려 있다. 투암기를 먼저 읽기를 잘했다. 그의 생애를 알고 나서 소설을 읽으니 더 깊이 다가왔다.

김학찬 유고집은 지난 22일쯤 독자와 만났다. 하지만 발행일은 그보다 빠른 ‘8월 10일’, 작가의 생일이다. 책의 ‘족보’에 그를 기념하기 위한 출판사의 배려다. 초판 1쇄는 한정판 양장본이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