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미국 워싱턴DC 워터게이트빌딩 민주당사에 불법 침입 및 도청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를 은폐하려던 정치적 스캔들에 연루된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탄핵 가결 직전인 74년 8월 9일 스스로 사임한다. 워터게이트 사건(Watergate Scandal)이다.
그런데 도청 사건 이듬해인 73년 11월 30일 통일교 문선명은 미국 주요 일간지 여러 곳에 “위기의 미국, 워터게이트 해법, 용서, 사랑, 결속”이란 제하의 전면 광고를 게재하고 금식기도를 진행하며 닉슨에 대한 공개 지지를 선언한다. 닉슨은 그해 12월 11일자 편지에서 문선명에게 감사의 뜻을 전달한다. 이를 시작으로 통일교는 조직적인 닉슨 옹호 집회를 진행했고 문선명은 닉슨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통일교 쇠락의 시작이었다.
77년 4월부터 78년 10월까지 활동한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국제기구소위원회(프레이저위원회)가 한국 정부의 정치 로비에 대한 조사를 진행한 후 ‘프레이저보고서(Fraser Report)’를 발간했다. 이 보고서에는 통일교와 한국 군사정권의 불법적인 정치권 로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통일교는 70년대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의 중심인 버클리대학교 앞에서 벌인 소수 신도의 찬전(贊戰) 및 반공(反共) 시위를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닉슨으로부터 “베트남의 평화를 위한 귀 단체의 3일간의 단식을 통해 베트남의 자유와 정의와 평화를 위한 우리의 싸움을 지지해 준 것에 감사드린다”는 내용의 축하 전보까지 받았다. 이를 시작으로 공화당과 CIA의 후원을 받으며 성장했던 미국 통일교는 부정직한 권력을 위한 불법적인 로비를 통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82년 문선명이 탈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교도소에 수감되면서 통일교의 미국 내 입지는 급격히 축소된다.
미국에서의 정치권 로비를 통해 얻은 학습효과를 통일교는 한국 군사정권 로비에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군사정권의 반공 정책을 넘어서는 승공(勝共)을 주장하면서 통일교는 광폭 행보를 시작한다. 정치적 정통성이 부재한 군사정권은 충실한 지지자가 필요했고 종교적 정통성이 없었던 기독교 이단 통일교는 강력한 후원자가 필요했다. 마침내 부적절하지만 불가피한 공생과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통일교의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권 로비는 어쩌면 숙명과 같다. 최근 이슈로 등장한 통일교의 불법적인 정치권 로비는 ‘일회적 일탈’이 아니라 ‘태생적 한계’로 볼 수 있다. 미국 공화당, 일본 자민당, 한국 보수정치권에 반세기에 걸쳐 꾸준히 자금 지원을 시도해 왔다. 정치권 내 통일교 장학생이 과연 현재까지 이름이 거명된 몇 사람이 전부라고 믿는 이는 거의 없다.
최근 윤석열정권 당시 노골적인 정치자금 지원과 신도들의 조직적인 정치 개입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 탄핵 직전 사임한 닉슨 대통령과의 정치적 관계로 인해 미국 통일교가 쇠락한 것처럼,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과 함께 시작된 통일교의 불법적 정치권 로비로 인해 통일교는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미국 프레이저위원회와 유사한 특검의 조사가 통일교 핵심을 향하고 있다.
일본의 아베 신조 전 총리 피격 살해사건으로 인해 통일교의 자금줄인 일본 통일교 법인이 취소된 위기 상황에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학자의 통일교는 국내에서 절체절명의 상황에 직면해 있다. 안으로는 한학자와 친아들 간의 후계 다툼과 혼란은 날로 격화되고 있다. 내우외환의 상황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혼란 속에서 미국 대통령 닉슨이 사임하고 닉슨을 옹호하며 불법적인 정치권 로비를 자행하던 미국 내 통일교는 몰락을 시작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과 권력 핵심을 향한 부적절한 로비로 인해 통일교는 다시금 한국판 워터게이트의 수렁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고 있다.
탁지일 부산장신대 교수·현대종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