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민 덕희’는 보이스피싱 피해자가 오히려 조직의 실체를 파헤쳐 가는 과정을 그려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충격은 결코 영화적 연출에 그치지 않는다. 영화 속 콜센터 조직의 구조, 피해자의 심리, 해외 거점의 존재는 현실에서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
보이스피싱은 개인의 일탈이 아니다. 캄보디아 시아누크빌과 같은 해외 범죄 허브에서는 조직화된 콜센터가 한국인을 겨냥해 실시간으로 범행을 저지르고 있다. 이들은 중국계 지휘부 통제 아래 한국인 조직원이 콜센터·이체·해킹팀으로 나뉘어 분업적으로 움직인다. 고수익을 미끼로 한국 청년을 유인한 뒤 여권을 압수하고 감금해 강제노역시키는 방식은 인신 매매, 노동 착취, 금융 범죄가 결합된 복합 범죄다. ‘검찰팀’이 수사기관을 사칭해 협박하고, ‘해킹팀’이 피해자의 금융 정보, SNS 계정을 탈취하며, ‘이체팀’은 자금을 세탁하는 등 기업형 시스템으로 이뤄진다. 단순한 사기를 넘어 하나의 산업 구조다.
그러나 현행법은 ‘개별 범죄 행위’ 중심이라 조직 전체의 고리를 입증하고 처벌하는 데 한계가 있다. ‘전기통신금융사기특별법’ 역시 피해금 지급 정지·환급에는 효과적이지만 해외 서버, 해외 결제 시스템, 암호화폐를 이용하는 경우 추적이 어렵다. 사기 피해의 책임 주체를 명확히 하기 위한 전기통신사업법 개정도 필요하다. 실제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올 상반기에만 보이스피싱 발생은 1만2000여건으로 전년 동기 대비 23% 증가했고, 피해액은 무려 98% 늘어난 6400억원에 달한다. 여기에는 AI 기술도 한몫한다. 모습이나 말투까지 재현해 가족도 구분하기 어렵다. 문제는 이 범죄가 금전적 손실을 넘어선다는 데 있다. 고령자·청소년 등의 삶이 무너지고, 금융 질서와 공적 권위에 대한 신뢰가 붕괴한다. 수사기관·금융기관 사칭 방식은 일종의 심리전이며 피해자가 경찰의 개입조차 거부하는 일도 발생한다. 이는 공권력 기능 상실로 직결된다.
보이스피싱은 이제 마약에 버금가는 국가안보 위협 요소다. 범죄 조직이 해외 도시를 거점 삼아 외교·금융 질서에 영향을 주고, 대국민 심리에까지 파고드는 상황에서 단속 중심의 사후 대응으로는 한계가 있다. 범죄 근거지를 ‘원점 타격’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경찰 못지않게 해외 정보망을 지닌 국가정보원의 역할이 중요하다. 실제로 중국 보이스피싱 조직 총책의 입국 시 즉시 체포, 2007년 광둥성 소재 대만계 콜센터 조직 129명 동시 검거, AI 화자 식별 기술로 동일 조직 내 역할 분류 성공 등은 국정원의 정보전과 국제 공조, 디지털 분석 기술이 결합한 결과물이다.
여기에 그치지 말고 정부 차원에서 ‘AI 기반 분석 플랫폼’을 조기 구축하고 금융기관, 통신사, 플랫폼 기업과의 민·관 통합 대응 및 실시간 정보 공유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전 세대 맞춤형 콘텐츠 제공 같은 대국민 예방 교육도 병행돼야 할 것이다.
채성준 서경대 군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