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구세군 본부에서 사역하시는 목회자였다. 내가 10대 청소년일 때 아버지가 서울 마포구에 있는 보육원 원장으로 부임해 우리 가족도 상암동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지금은 서울 도심가지만 당시 상암동은 수색에서 굴다리를 지나야만 들어갈 수 있는 외진 마을이었다. 도로도 제대로 나 있지 않았고 집 몇 채와 미나리 밭이 전부였다. 그곳에서 나는 원치 않게 보육원 아이들과 형제가 되었다. 그 순간부터 내 어린 시절은 또래들과는 전혀 다른 특별한 훈련의 시간으로 바뀌었다. 그곳은 훗날 구세군서울후생원이 된다.
보육원에서 가장 먼저 배운 것은 ‘힘이 곧 법’이라는 냉혹한 현실이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없는 아이들은 자신을 스스로 지켜야 했고 살아남기 위해선 누구보다 강해야 했다. 형들이 동굴에 숨어 담배를 피우면 나도 호기심에 따라 들어가 함께 앉곤 했다. 피울 줄도 모르면서 괜히 질세라 입에 물었고 한 번은 담배 한 갑을 다 태우고 기절해버린 기억도 있다. 늘 지는 것을 싫어하던 나는 형들과 몰려다니며 원 밖 아이들과 자주 싸움을 벌였다. 보육원 형제 중 하나가 당하면 모두가 우르르 몰려가 맞섰다. 그것이 우리 나름의 방식이었다. 그 단결은 얼마나 강했던지 동네 불량배들조차 우리와 마찰을 피할 정도였다.
잊을 수 없는 사건들도 많았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한 형이 뒷산에서 뱀에 물렸는데 몰래 나간 사실이 들통나 혼날까 봐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하루를 그냥 넘겼다. 다음 날 팔이 퉁퉁 부어 병원에 갔을 때는 이미 늦어 결국 팔을 잃고 말았다. 어린 나이에 지켜본 그 장면은 충격이었다.
보육원에서 나쁜 기억만 있는 건 아니다. 특별히 나의 마음을 특히 설레게 했던 것도 있었다. 바로 브라스 밴드였다. 대부분 형으로 이뤄진 밴드는 환상적인 앙상블로 강당을 가득 울렸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금관악기의 힘찬 합주는 언제나 내 가슴을 뛰게 했고 음악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매번 연습이 시작되면 나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세월이 흘러 그 멤버 중 몇 명은 대한민국 최고의 트럼펫 연주자가 되었다. 나 역시 성탄절이 다가오면 강당 무대에 올라 연주하며 마음껏 기량을 뽐낼 수 있었다. 평소에는 사소한 일로 싸우던 형제들이었지만 성탄절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한마음이 되어 연주하고 모두 함께 기뻐하며 축제를 즐겼다. 그 순간만큼은 누구도 고아라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았다. 음악은 우리에게 위로였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하는 희망이었다.
돌아보면 보육원에서의 시간은 내 인생을 단단하게 빚어낸 중요한 과정이었다. 싸움 속에서 억울함을 견디는 법을 배웠고 눈물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는 힘을 길렀다. 무엇보다 음악을 통해 새로운 길을 보게 되었다. 그곳에서 흘린 눈물과 땀은 내 성격을 강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음악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보육원은 나를 아프게도 했지만 동시에 나를 자라게 한 특별한 훈련장이었다.
정리=김수연 기자 pro111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