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금융’ 책무 잊었나… 화석연료 보장 대폭 늘린 보험사들

입력 2025-08-28 00:08
게티이미지뱅크

기후 위기가 심각해지면서 이에 대응하기 위한 ‘조력자’로서 보험 업계의 역할이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최근까지도 국내 보험 업계에서는 화석연료에 대한 보장을 대폭 늘리고, 반대로 재생에너지에 대한 보장은 제자리걸음을 거듭해 기후위기 대응에 역행한다는 지적이 있어왔다. 보험 업계가 기후금융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도록 배출량 공시 제도 도입, 기후 관련 공동행위 면책 등 제도적 개선이 동반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6일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에 따르면 국내 주요 10대 손해보험사의 화석연료 대상 보험 보장 잔액은 2023년 말 139조8000억원에서 지난해 6월 말 기준 182조7000억원으로 6개월 사이 30.7% 증가했다. 연료별로 보면 석탄 부문에 대한 보험 잔액이 같은 기간 82.3% 늘어 가장 증가세가 가팔랐다. 다른 주요 화석연료인 천연가스(43.1%)와 석유(12.2%) 역시 잔액 규모가 대폭 확대된 것은 마찬가지다.


2020년대 초반 본격적인 상업운전에 돌입한 고성하이·강릉안인 등 신규 대형 석탄발전소의 존재가 이 같은 ‘역주행’을 견인했다. 상업운전 개시로 이들의 보험 수요가 급증하자 보험사들이 발맞춰 대규모로 운영보험을 인수한 것이다. 천연가스의 경우 에너지 안보 강화 차원에서의 대규모 저장 인프라 구축 등이 보험 수요 증가를 초래한 주요 원인으로 분석된다.

반면 신재생에너지 관련 보험 규모는 좀처럼 ‘걸음마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주요 10대 손보사의 신재생에너지 관련 잔액은 2021년 말 20조1000억원에서 2023년 말 20조9000억원으로 2년간 8000억원 증가하는 데 그쳤다. 지난해 6월 말 기준으로는 24조8000억원으로 반년 전보다 3조9000억원 증가한 보장 액수를 기록했지만, 여전히 화석연료 대비 잔액 규모가 13.6%에 불과하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은 지난달 출간한 ‘2024 화석연료금융 백서’에서 “이 같은 보험 제공은 직접적 자금 조달은 아니지만, 위험 분산을 통해 화석연료 프로젝트의 투자 안정성을 높여 간접적으로 자금 유입을 촉진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보험 업계의 이 같은 ‘반기후적’ 행보는 국내 금융산업 전반의 더딘 ‘녹색 전환’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지난해 상반기 말 기준 국내 112개 금융기관의 화석연료금융 규모는 합계 372조3000억원에 달했다. 그중 손해보험 업계의 금융 규모가 보험 포함 194조4000억원으로 집계돼 전체의 52.2%에 달했다.

이는 세계적 추세와 극명하게 엇갈린다. 현재 전 세계 금융·보험 업권은 기후위기 극복에 기여하는 보험의 역할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영국의 ‘지속가능한 시장 이니셔티브(SMI)’는 2023년 발표한 보험 분야 보고서에서 “보험은 여러 산업이 ‘지속가능한 미래’로의 적응·전환을 위해 기후친화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보호·투자하는 핵심적이고 고유한 역할을 한다”고 짚었다.

특히 기후금융 시대의 보험에서는 자산을 어느 산업에 투자할지를 결정하는 ‘자산운용자’로서의 역할과 보험 계약의 승인 여부를 심사하는 ‘언더라이터’의 역할이 주목받고 있다. 가급적이면 신재생에너지 분야 사업에 대규모 자산을 투자하고, 반대로 대규모 석탄화력 프로젝트의 리스크 해소에는 협조하지 않는 식으로 탄소중립 실천을 앞당길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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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예시가 호주 아다니 사의 퀸즐랜드 석탄 개발 사업이다. 해당 사업은 2019년 이후 40개 이상의 글로벌 보험사가 연달아 보험 인수를 거부하면서 사업 진행과 금융 조달에 극심한 차질을 겪었다. 미국 알래스카주의 석유·가스 개발 프로젝트가 수십년간 개발이 지연된 데도 야생동물 보호구역 등의 입지조건을 고려한 보험사들의 언더라이팅 거부가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기후 재난으로 발생하는 피해를 보상하고, 이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수치로 나타내 정부·기업이 탄소중립 실천 필요성을 명확히 인식하게 만드는 ‘위험 관리자’의 역할 역시 보험의 핵심적인 기능이다.

다만 국내 보험 업계의 경우 위험 관리 부문에서도 진도가 더딘 편이다. 한국은행은 보험사들이 적기에 기후변화 대응에 나서지 않을 경우 대규모 ‘기후 리스크’에 노출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 3월 한은이 발표한 기후 스트레스테스트 결과에는 제대로 된 대응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2100년 시점에서 국내 생보사와 손보사의 지급여력비율은 기후변화로 인해 각각 17.3% 포인트, 43.9% 포인트 하락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국내 보험사 중 이 같은 리스크를 관리 체계에 반영하기 시작한 것은 일부 대형 업체에 불과하다. 한은에 따르면 지난 3월 시점에서 국내 보험사 42곳 중 기후 스트레스테스트를 실시한 기관은 12곳에 불과했다. 12개 업체 중 구체적인 리스크 감축 계획을 수립·추진 중인 업체는 4곳뿐이었다.

전문가들은 금융기관이 투자한 산업·기업의 탄소배출량을 반영하는 ‘금융배출량’ 공시 체계를 조속히 도입하고,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보험사들의 공동행위를 공정거래법상으로 명확히 면책해주는 등의 제도적 정비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승준 보험연구원 연구위원은 “탄소중립을 실천할 수 있는 투자 방향이 투명하게 공시되고, 업계 전체가 공동으로 석탄연료 등의 인수를 거부할 수 있도록 명확한 면책 사유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의재 기자 sentinel@kmib.co.kr